[사람중심] 2005년에 모바일 VoIP와 관련된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모바일 VoIP 서비스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통신서비스로 주목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생소한 개념이었던 모바일 VoIP 서비스가 주목을 받은 것은, 휴대전화에서 통신비가 저렴한 인터넷전화를 쓸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일반 휴대전화기에 WiFi 칩을 넣어 인터넷전화를 쓸 수 있게 한 단말로 VoIP 통신을 하는 방식이었죠.
그러나, 이것 보다 더 중요하게 제 흥미를 불러일으킨 요소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모바일 VoIP라는 서비스로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기획 기사를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해외 자료들을 조사해 봤는데, 가까운 일본과 대만을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속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해당 국가의 메이저 통신사들이 모바일 VoIP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부나 지자체가 이런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부·지자체가 나서서 ‘저렴한 통신서비스’ 주도한다?
두 가지 움직임 모두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통신사가 직접 나서서 요금이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부가 통신사의 수입이 줄어들 일을 저지른다니... 통신 시장에 사실상 경쟁이라는 개념이 없고, 정부가 오로지 대형 통신사만을 결사적으로 보호하는, 그래서 소비자에게는 선택의 여지란 없는 시장에서는 꿈같은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당시 일본에서 모바일 VoIP 서비스 제공에 가장 적극성을 보이는 통신사는 NTT 도꼬모였습니다. 왜 일본을 대표하는 통신사가 스스로 매출을 갉아먹을 수 있는 서비스에 열을 올렸을까요? 바로 MVNO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당시 MVNO 사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통신 시장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MVNO들이 WiFi가 탑재된 듀얼모드(셀룰러+WiFi) 휴대전화 단말을 제조사에 공동주문해 단말 공급비용을 낮추는 것을 물론, 모바일 VoIP 서비스로 기존 통신사들과 차별화에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MVNO의 이러한 시도가 인기를 얻자 NTT 도꼬모로서는 고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바일 MVNO 서비스를 시작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비싼 정액제와 맞바꾼 WiFi 사용, 그러나 통화는 언감생심
당시 기사에 일본, 대만, 영국, 독일, 미국 같은 여러 나라의 사례들을 소개했는데, 이들 나라 가운데 대다수는 정부가 나서서 모바일 VoIP를 준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만에서는 나라 전역에 모바일 VoIP를 위한 WiFi망을 구축 중이었고, 독일도 정부가 나섰습니다. 미국이나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는 지자체 주도로 WiFi 구축이 이루어지고 있었고요.
이 같은 움직임은 통신 시장이 발달한 나라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4~5년 전부터 정부가 대도시 전역에 WiFi를 구축해 서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전화 통화와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꿈같은 일입니다. 2009년 말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스마트폰 바람이 불자 2010년부터 통신사들이 WiFi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적인 목적입니다.
갑자기 폭증한 무선 데이터 트래픽을 기존 이동통신망에서 감당하려면 서비스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많은 추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차라리 WiFi를 많이 구축해서 트래픽을 분산시키는 목적입니다. 이미 정액 요금제로 꽤 많은 이용료를 내고 있으니 과거처럼 WiFi 유료화에 목을 매지 않고 선심 쓰듯 제공하는 것이죠(그래도 스마트폰에서 VoIP를 쓰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MVNO 등장이 두렵지 않은 통신 시장
통신 요금과 관련해 최근 들어서는 LTE 서비스에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없앤 것이 논란거리입니다. 하지만, 통신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선택이 셋 중 하나인데, 셋 다 똑 같은 정책이니 ‘쓰기 싫으면 말던지’하는 심보로 느껴집니다.
애초부터 다른 나라들처럼 MVNO가 활성화됐더라면, 통신사들이 이처럼 배짱 영업을 할 수 있었을까요? 스마트폰 이용자는 정액 요금에 가입하면서, 할당된 통화량을 다 쓰고 난 초과분부터는 아무리 많이 써도 할인을 적용받지 못하는 그런 정책으로 마음놓고 전환할 수 있었을까요?
MVNO는 저렴한 통신비를 기본으로,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발굴해 기존 통신사들과 차별화하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통신사의 망 이용 대가를 산정하는데 있어서 ‘망 중립성’이 철저히 지켜져야 합니다. 통신사가 자신들의 계열사나 특수관계사에 망을 빌려줄 때의 요금과 MVNO 같은 제3의 사업자에게 빌려줄 때의 조건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망 중립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MVNO의 요금이 더 높아집니다. 통신서비스 원가 중에서 통신사에 지불하는 망 이용료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MVNO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정부가 적극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고, 최근 몇 년 간은 망 이용대가 산정에서 정부가 통신3사 쪽에 서 있었던 것도 주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정부당국이 공청회를 열어서 제시한 안이 통신사 안과 같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통신시장은 ‘통신 정책 = 통신사’
MVNO는 거대 통신사만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하는, 대한민국 통신 정책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 중립성을 정책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MVNO들이 생겨나더라도 통신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서비스나 콘텐츠 개발을 등한시해도 이른바 ‘빨랫줄’만 쥐고 앉아 있으면' 돈을 벌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남의 이야기지요.
몇 달 전 어떤 세미나에 패널 토론자로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멀티미디어 스트리밍과 관련된 세미나였는데, 그 자리에서 망 중립성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습니다. 질문을 받은 통신사 임원은 “통신사가 적정한 수익을 올려야 그것이 재투자해서 통신 기술이 발전하고, 서비스도 좋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고 답했습니다.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천상 엔지니어’였는데도, 예의 그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더군요.
질문자가 제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에 “싸이월드에서 발생하는 모바일 트래픽이 SK텔레콤 전체 모바일 데이터 트래픽의 22% 정도 된다고 들었다. 22%는 고사하고 통신사 모바일 데이터 트래픽의 2%만 차지하더라도 엄청난 콘텐츠가 될 텐데, 망 중립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망 이용료 폭탄을 맞거나 이용료를 올려주지 않으면 통신사가 망 임대를 거부할 수도 있다. 정말 좋은 콘텐츠 하나가 사장될 수도 있는 거다”고 말했습니다.
KT 망을 임대하는 MVNO 에버그린모바일이 15일, 스마트폰 가입자가 각자 이용패턴에 맞춰 음성통화와 데이터 통화량을 구성하는 선택형 요금제를 내놓았습니다. 기존 통신3사의 정액제처럼 통화·문자·데이터 통신량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원하는 요금제를 골라서 조합해 패키지로 가입할 수 있게 한 것이죠. 통화량이 많은 가입자라면 통화 500분에 문자 100건, 무선데이터 100MB 하는 식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기본료도 없습니다. 매력적인 상품이어서 몇 달 뒤 약정이 끝나는 대로 옮겨 볼 생각인데, 과연 이 회사의 수익성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요금제로도 적정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기존 요금제가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MVNO는 아니지만, 카카오톡이 2월부터 일본에서는 모바일 VoIP 서비스를 탑재한 카카오톡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국내 음성통화 서비스의 경우 통화품질 문제 등이 여전히 해결 안 되고 있어 현재는 서비스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인데, 관련 업계에서는 국내 이동통신사와의 마찰을 의식한 것으로 보는 분위기입니다.
어렵사리, 외국 보다 7~8년 늦게 시작된 MVNO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이동통신 이용자들은 좀 더 저렴한 요금을 내고도 좋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정책’이 감당해주지 않으니 시장의 선순환구조를 기대할 뿐입니다만, 선순환구조가 생길 지는 의문입니다. MVNO의 저렴한 서비스가 인기를 끌었을 때 거대 통신사가 무차별 마케팅 공격을 퍼붓는다면 과연 몇개 MVNO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 정작 필요한 통신 분야에서는 종편 채널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 거지?’하고 말입니다. 기존 방송사에도 없는 온갖 특혜를 후발주자에게 다 주었던 그 정책기조의 1/10 만큼만 MVNO를 배려한다면, 이 정부의 공약이었던 ‘가계 통신비 20% 인하’는 누워서 떡먹기일 텐데요.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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