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블랙베리 볼드9900이나 9000을 하나 구입할까 해.”
지난 달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그는 아이폰을 쓰다 최근에는 갤럭시노트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블랙베리 얘기를 꺼내길래,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쓰다가 블랙베리로 바꾸면 불편할 텐데. e-메일 확인할 일도 많지 않잖아?”하고 말했습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e-메일에 쫓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최근에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폰을 보면 블랙베리의 전망이 그다지 밝은 것 같지 않아. 그래서 깨끗한 중고 하나 사두려고. 나중에 희소가치가 생겨서 가격이 오를 지도 모르잖아?” 과거 블랙베리를 이용했던 그이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더 이상 블랙베리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규모 적자, 석 달 만에 매출 21% 감소
리서치인모션(RIM)이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림은 지난 달 29일 회계연도 4분기(2011년 12월~2012년 2월) 실적 발표에서 매출 41억 9,000만 달러에, 1억 4,200만 달러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1,600억원이나 되는 이런 대규모 적자는 림이 처음 겪는 상황입니다. 2년 전만 해도 연간 영업 이익이 46억 달러를 넘었으니까요.
4분기의 블랙베리 선적량은 약 1,100만대인데, 이는 3분기 보다 무려 21%나 줄어든 것입니다. 매출은 25%가 줄었습니다. 림은 팔리지 않은 2억 6,700만 달러 상당의 신형 블랙베리7 모델을 감가상각할 계획입니다.
애플 아이폰과 다국적 안드로이드폰의 빠른 진화 앞에 타이핑 기능과 e-메일 수신의 장점으로 독자 영역을 구축했던 림은 부진 탈출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림은 최근 전 공동 CEO의 이사직 퇴임과 CTO(최고기술책임자, COO(최고운영책임자) 등 핵심 경영진의 사퇴가 있었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투자자들의 경영진 교체 요구 끝에 지난 1월 토르스텐 하인스가 CEO로 취임하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치 않다”고 선언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내려진 특단의 조치입니다.
림은 현재의 스마트폰들과 비교해 각종 어플을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는 점 평가 때문인지 “기업 시장에 보다 집중한다”고 수정된 전략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외신들은 “개인용 스마트폰 사업을 사실상 접을 정도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전개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죠.
‘기업 시장’으로 눈 돌려...매각 가능성도
월스트리트저널은 “신임 하인스 CEO는 회사의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회사가 보유한 가치 있는 자산과 긍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개혁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더 규모가 큰 기업과 연합하는 식으로 그 위험을 피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매각 가능성도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윈도폰으로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는 어렵겠지만, 아마존은 림 인수설이 로이터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태블릿 시장에 진출한 델이나 스마트폰·태블릿에 막태한 투자를 하고 있는 레노보에게는 림의 기술과 특허가 아주 매력적일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전자는 림과 신규 OS 라이선스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 블랙베리, 누가 인수할 것인가? 삼성?)
전세계에 사용자가 7,700만 명이나 있는 블랙베리의 급속한 추락에서는 닌텐도의 추락이 오버랩됩니다. 작은 게임기 하나로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어서며 ‘창의와 혁신’의 대명사로 첫손에 꼽혔던 닌텐도는 ‘전용 게임기’ 방식을 고집하다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림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 때문입니다.
닌텐도와 림은 스마트폰의 피해자?
인터넷을 뒤져 보니 IT 평론가 안병도님이 게임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 개발부장은 인터뷰한 내용이 있습니다. 2009년 2월의 인터뷰인데 “애플이 닌텐도의 경쟁자라는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애플이 훌륭한 회사이지만, 슈퍼마리오는 없지 않느냐?”고 답했군요. 슈퍼마리오는 여전히 아이들이(일부 어른들도) 열광하는 캐릭터이지만, 닌텐도DS와 Wii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임은 사용자에게도 개발사에게도 불편한 것이 사실이죠.(관련 글 - 닌텐도의 몰락, 과연 폐쇄성 때문일까?)
안병도님은 닌텐도의 몰락이 폐쇄성 때문이기 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높아져 있는 소비자의 시선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블랙베리 역시 같은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말 싱가포르 출장을 갔을 때 선배 한분을 만났는데, 야경이 좋은 곳에 가서 각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블랙베리를 쓰는 선배는 저 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한참이 지난 뒤에야 페이스북을 마치더군요. 싱가포르에 상주하기 때문에 한국의 가족, 지인들과의 소통은 페이스북이 유일한 창구인데 몹시 불편해 보였습니다. “페이스북 쓰기 불편하면 애플이나 구글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그러세요?” 했더니 “회사에서 주는 거라 그냥 쓰는 거야. e-메일도 자주 봐야 되고...” 블랙베리의 e-메일 사용이 편리하다는 것은 더 이상 ‘블랙베리만의 장점’은 아닙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를 호령하며 엄청난 인기와 수익을 맛보던 림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적어도 블랙베리 그 자체의 변화만으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팜을 인수한 HP는 기업용으로 강력하다는 팜의 웹OS를 앞세워 스마트 디바이스 시장에 도전했다가, 지금은 개점휴업 상태입니다. 강력한 아성을 구축한 애플, 거대한 생태계를 만든 구글을 단일 기업이 뛰어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라는 괴물들의 결합도 앞날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본 ‘블랙베리 떠나보내기’라는 기사의 인상적인 마지막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아이폰4S로 바꾸고 에버노트와 동기화를 사랑하게 된 크리스 훅스는) 요즘은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 눌러놓는 데 블랙베리를 사용하고 있다.’
(관련 기사 - 블랙베리 떠나보내기)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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