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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전망

정부와 언론의 부창부수?...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람중심]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계획성 없이 일을 처리하다가 문제가 생기고 난 뒤에 수습책을 마련한다고 부산을 떠는 경우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지난 주말 이 속담에 딱 들어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미FTA 시행 이후 다국적 SW기업들이 공공기관을 상대로 SW라이선스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IT 업계의 주요한 관심거리 중 하나가 되고 있는데, 지난 주말 정부 5개 부처 관계자들이 모여 첫 대책회의를 한 겁니다.


얼마 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가 국방부를 상대로 불법 SW 사용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청구한 금액이 무려 2100억원이나 됩니다. 대책회의에 참석한 5개 부처 관계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이언트접속라이선스(CAL) 추가비용 요구가 국방부만의 이슈가 아니라 전 부처에 해당되는 공통사항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군요.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을 '의견을 모았다'고 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국방부에 불법 SW 사용과 관련해 요구한 추가비용 2100억원 중 CAL 비용이 절반에 이릅니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 관계자는 “MS 서버 도입에 따른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면 별도 CAL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았다”면서 “이는 대부분 정부부처가 동일한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용료를 요구한 것을 보면, CAL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규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관행이었던 모양입니다.


문화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문제제기한 내용들이 FTA 조항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하는 사항인지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합니다. 법무부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장이 법 근거가 있는지 파악하기로 했다네요. “첫날 회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곧 추가회의를 개최해 후속 논의를 할 계획”이라는 것이 행안부 관계자의 얘기입니다. 아무리 첫 회의라지만, 구체적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 정부나 중앙 부처들이 이 문제와 관련해 이전에 전혀 고민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SW 사용료 문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을까?

국방부를 상대로 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대규모 라이선스 비용 청구가 있은 뒤 다국적 SW 기업들의 행태를 문제 삼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5개 부처가 대책회의를 했다는 사실도 여러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SW 등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분쟁은 한미FTA 체결이 논의될 때부터 이미 충분히 예상됐던 사안입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그런 문제제기와 관련된 내용은 지금까지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한미FTA와 IT의 관계를 조명해보는 기사나, 정부 주도의 공청회 등에서 이 문제는 늘 부차적인 주제였습니다. 오히려 "빨리 FTA가 체결돼야 IT 산업이 살길이 생긴다"고 하는, IT 업계 일각의 성명서 발표는 늘 크게 다루어졌죠.


그런 점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정부 당국과 언론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멋진 팀웍이 아닐 수 없네요.


지난해 한미FTA가 한참 논란이 됐을 때 나이 지긋하신 관세사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세청에서도 일을 하셨던 이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미FTA가 체결되면, IT 분야 가운데서도 SW, 컨설팅서비스 같은 분야가 가장 위험합니다"고 하시더군요. 


오랫동안 무역 관련 분야에 몸담아 오신 경험과 지식으로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이 말씀이 그 분만 가진 날카로운 혜안에서 나온 예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무역 관련한 지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고 하셨거든요. 그 분께서는 대기업의 IT 사업은 계열 SI가 독점하고 있는데, 컨설팅 사업 수주 등과 관련해서 미국 컨설팅 회사가 얼마든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누구나 예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이제 와서 외양간을 고치려는 걸까요? 진짜 고치려는 마음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해야 돼서 그러는 걸까요? 하긴 한미FTA가 우리 경제의 모든 영역에 엄청난 선물만을 안겨줄 거라고 했다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드러나는 분야가 어디 IT뿐이겠습니까?


한미FTA ISD 조항

물론 다국적 SW 기업들의 행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1~2억도 아니고, 그동안 힘 있는 공공기관이라고 해서 아무소리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수천억원을 지불하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되도록 만들어 준 것은 우리 정부입니다. ISD(투자자-국가 소송제도)라는 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기업이 비즈니스에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면 소송을 해서 손해를 보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ISD : Investor State Dispute-Settlement.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상대방 국가의 정책으로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중제센터나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등 국제 중재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


막걸리 한잔 얻어먹은 댓가로 "우리 밭에서 채소 가져다 먹어라"고 허용을 해준 밭주인은 상대방이 아무 때나 채소를 걷어간다고 해도 "도둑이야"하고 소리 칠 자격이 없습니다. '한번만 가져가라'거나, '한 번에 얼마 이상은 가져가지 마라'는 단서조항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가장이 그런 약속을 할 때 말리지 않고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가족들 또한 아무 할 말 없기는 마찬가지죠.


어쨌든 문제가 터지고 나니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는데, 그 대책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전적으로 미국 SW 기업들의 결정입니다. 물론, 공공 분야는 전체 산업 가운데서도 비중이 큰 영역이고, 또 공공기관의 위세를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나 서비스, 컨설팅 대가를 규정대로 다 내놓으라고, 특정 업체에 일을 몰아줘서 손해를 입었으니 배상해 달라고 말할 근거가 생겼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SW 라이선스 계약에서 심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지금까지 보다는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게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지적재산권 가치 인정하는 계기 만들어지길

일각에서는 중앙 부처들의 공동 대응을 통해 미국 SW 기업들이 라이선스 정책을 무리하게(사실은 정확하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ISD는 자그마한 근거라고 있으면 미국 기업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손실을 입었으니 배상하라'고 소송을 할 수 있게 해주려고 만들어진 조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기업이 서울에 버스회사를 차려놓고 서울시가 버스회사에 보조금을 주는 것을 빌미로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안 SW처럼 국산 제품 사용을 권장하거나, 국산 제품이 사실상의 표준처럼 되어 있는 분야는 어쩌면 ISD의 단골손님이 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중앙 부처들의 대책회의가 실속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기업이 정해 놓은 상품 판매 규정(이미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을 놓고 공공기관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죠.


외국계 IT 기업들은 하나같이 "한국 시장은 서비스나 컨설팅, 지적재산권 같은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통신사나 대기업이 서버, 네트워크 장비 같은 하드웨어 도입을 앞두고 실시하는 벤치마크테스트(BMT)를 예로 들면, 일본에서는 BMT에 참가하는 기업들에게 BMT 비용도 지불합니다. NTT도꼬모는 지난 3년 간 한 번도 통신망에 장애가 나지 않았는데, 연간 투자비의 30% 정도를 유지보수 같은 서비스에 쓴다는군요. 우리 통신사들은 어떨까요? 10%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SW, 서비스, 컨설팅 같은 지적재산권에 제대로 비용을 지불하게 되면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지적재산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 그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 더 똑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게 되지 않을까요?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일수록 알뜰히 사용하고, 공짜로 헬스클럽 티켓이 생기면 열심히 다니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지양해야 될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또다시 외양간을 대충 만드는 일일 겁니다. 일단은 외국 SW 기업이 제시한 엄청난 사용료나 좀 깍고 보자는 대책이 아니라, 지적재산권과 관련해 공공기관들부터 제대로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근거로 고객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할 수 있는, 상식적인 대책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참고> 호주 정부와 필립 모리스의 소송


ISD와 관련해 자료를 찾다 보니, 호주에서 재미있는 소송이 벌어지고 있네요. 지난해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가 호주 정부를 고소한 내용입니다.


지난해 호주 정부는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세계 최초로) 2012년부터 모든 담뱃갑의 포장을 칙칙한 황갈색으로 통일하고, 특정 담배 상표를 표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황갈색이 ‘흡연자들이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색’이라는 연구결과에 근거한 것이랍니다. 


호주는 미국과 FTA를 체결할 때 ISD 조항을 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필립 모리스는 홍콩 지사를 통해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호주와 홍콩이 체결한 BIT 조약에 포함된 ISD 조항을 근거로 호주 정부를 걸고 넘어지는 겁니다. 


이 사건에서는 필립 모리스가 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패할 확률이 높은 소송을 왜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런 소송이 비슷한 정책을 추진할 지도 모르는 나라들에게 일종의 압박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랍니다. ISD를 직접 체결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렇게 나올 정도면, ISD를 체결한 나라의 정부를 상대로는 훨씬 대담하게 나올 수 있겠죠. ISD라는 칼자루가 있으니까요.


우리 정부는 “공공정책은 FTA에서 예외”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필립 모리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공공정책이 미국 투자자의 사업에 방해가 되면, 얼마든지 소송꺼리가 됩니다. “공공정책은 FTA에서 예외”라고 주장은 미국이 아니라, 국민들에게만 하는 소리였던 걸까요?


필립 모리스가 소송을 했을 때, 호주 정부는 이런 발표로 기꺼이 소송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담배회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처럼, 우리도 국민의 건강을 위해 싸우겠다.”

(블로그 http://sapientis.tistory.com/385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