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세계 1위 통신장비 공급업체인 스웨덴의 에릭슨과 LG전자의 합작기업 LG-에릭슨이 6월 30일 드디어 출범을 알렸습니다.
에릭슨은 지난 4월 노텔이 가진 LG-노텔 지분을 인수해 LG전자와 함께 새로운 합작법인 설립을 진행해 왔습니다. 지분은 LG-노텔 때와 마찬가지로 에릭슨이 50%+1주, LG전자가 50%-1주를 갖게 됩니다.
LG-에릭슨의 출범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2005년에 있었던 LG-노텔의 출범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LG전자와 합작파트너의 지분 구조가 그렇고, 50%+1주를 가진 외국 기업의 목표 또한 대동소이합니다.
2005년 당시의 노텔은 3G 액세스 부문에서 전세계 선두권의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영업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책적인 판단과 맞물려, 국내 기업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던 분위기 때문이었죠.
결국 SK텔레콤과 KT(당시 KTF)의 3G 장비 공급업체 선정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지역을 번갈아가며 1, 2 순위 사업권을 갖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기술이나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자신했던 외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달리 손쓸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러던 차에 노텔과 LG전자의 합작법인 설립이 터져 나왔습니다. 3G 이동통신 네트워크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앞둔 큰 시장을 차지하고 싶은데, 독자 영업으로는 도저히 방법을 만들 수 없었던 글로벌 기업의 초강수였다고나 할까요?
5년 전과 다른 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당시 노텔은 국내 통신사가 3G 인프라 도입을 검토하던 과정에 열심히 영업을 하고도 사업권을 따내지 못하자 합작사 설립으로 방법을 바꿨던 반면, 에릭슨은 4G 기술 경쟁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합작사를 만들었다는 접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기업을 통하지 않고 차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상황은 5년 전과 변함이 없고, LG-노텔이 이미 국내 3G 시장 영업에서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어 4G 시장에서도 보다 확실한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정을 내리기는 훨씬 쉬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장비 공급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3G에서는 네트워크 코어 장비는 LG-노텔이 자체 개발한 제품을 공급하고, 액세스(기지국) 장비는 노텔의 것을 공급했습니다. 반면, 4G에서는 코어와 액세스 모두 에릭슨 장비를 공급한다는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방침입니다.
데이터 장비나 유무선 전화기 등은 과거와 다름 없이 LG-에릭슨이 자체 개발한 것을 공급하게 되는 반면, IP텔레포니 쪽은 조금 변화가 있습니다. 노텔의 IP텔레포니 시스템을 어바이어가 인수하면서 LG-에릭슨은 자체 개발한 장비를 공급하게 됐습니다.
광통신 쪽은 기존 노텔 장비가 시에나로 넘어간 상태이고, 에릭슨은 자체 제품군을 갖고 있는데(마르코니 인수) 앞으로 LG-에릭슨이 두 브랜드의 장비를 모두 공급할지 어떨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로서는 두 브랜드 모두 공급하는 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앞으로 LG-에릭슨이 어떻게 자신들만의 경쟁력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액면 그대로 보자면, 3G 이동통신 분야에서 코어 장비를 공급하던 과거와 비교해 더욱 영업에만 초점이 맞춰진 조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LG-에릭슨이 보유한 1000명이 넘는 연구개발 인력을 에릭슨이 그냥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에릭슨 본사 관계자들은 “LG-에릭슨은 4G 경쟁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슨, 에릭슨은 중국과 일본에도 대규모 R&D 센터가 있지만, 일본은 리서치 센터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중국은 3G에 집중합니다. 특히 중국은 TD-SCDMA라는 독자 표준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LG-에릭슨이 4G 기술개발에 주력하면 중국, 일본의 R&D 센터와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에릭슨 본사의 설명입니다.
LG-에릭슨은 이미 국내 시장에 2G부터 4G까지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4G ready’ 시스템을 공급한 바 있고, 4G에서 급증하게 될 데이터 트래픽을 효과적으로 처리해줄 소형 중계기 개념의 ‘스몰셀(small cell)’도 개발하는 등 4G와 관련된 자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술이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춘 에릭슨의 역량을 만나 더욱 다듬어진다면 해외 시장에 동반 진출해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동통신 기술·서비스가 발달한 한국 시장에서 갈고 닦은 기술·제품은 분명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중요한 전제조건 한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4G 서비스를 적극 검토하고, 늦지 않게 도입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통신사들이 4G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이 과정에서 장비 공급업체들이 통신사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기술·제품을 부지런히 다듬어야 실제 서비스 현장에서 신뢰를 줄 수 있는 완성품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다들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4G에 관련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4G의 후보 기술 가운데서 LTE 얘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통신사들이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입니다.
시장이 열리고, 그 시장에 맞게 제품을 가다듬고, 그렇게 해서 쌓은 기술과 경험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데, 국내에서 아무런 비즈니스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에릭슨이 굳이 LG-에릭슨에게만 우선적으로 기술을 전수해 해외 시장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열어주기란 만무한 일입니다.
‘LG-에릭슨이 4G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추면 중국, 일본의 에릭슨 R&D 센터와 다른 경쟁력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은 결국, 국내에서 늦지 않게 4G 시장이 열려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유럽은 물론, 2G 기술로 CDMA를 선택했던 나라(일본, 미국)의 주요 사업자들이 속속 LTE 구축을 선언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제조건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4G 분야에서 적절한 시점에 비즈니스를 전개하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내 이동통신 분야의 기술·노하우에서 중요한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이 ‘LG-에릭슨 시기’ 이후에도 계속 경쟁력을 유지할 것인지를 좌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 4G 시장이 늦게 열리면 LG-에릭슨은 점점 더 영업에만 집중하는 캐릭터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비즈니스 기회가 없는데 기술개발에 더 무게를 둘 기업은 없을 테고, LG-에릭슨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차세대 기술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진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손실이 되겠죠.
저는 지난해 다른 직장에서 4G 세미나를 진행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미나에 ‘LTE’라는 명칭을 넣었더니 모든 통신사가 다 참가 못하겠다는 답변을 해왔습니다. LTE에 관심이 많고, 기본적인 계획도 있지만, LTE 간판을 단 세미나에 나가서 발표하면 미운 털이 박힌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세미나 제목의 LTE를 4G로 바꿔넣고, 그리고서도 한참 동안 통신사들을 설득한 뒤에야 그들이 앞으로의 전략을 발표하도록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과거 초고속 인터넷 도입 시기처럼 정책 차원에서 4G를 드라이브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장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쓸 데 없는 비용 낭비를 막을 수 있고, 각 기술들이 경쟁하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새 문패를 달고 새 출발을 시작한 LG-에릭슨이 기술과 영업 어느 쪽에서나 처지지 않고 계속 경쟁력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참, 그러고 보니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2005년 당시 LG-노텔 설립과 관련해 흥미로운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동통신 인프라 사업의 특성상 영업권을 따내기까지는 상당한 규모의 영업 비용이 투입됩니다. 통신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수시로 워크샵을 진행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글로벌 통신사에서 자사의 장비를 잘 쓰고 있는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연용 장비를 마련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거의 2년에 걸친 장비선정 기간 동안 모 외국 기업은 100억원에 가까운 영업 비용을 썼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LG-노텔 출범과 관련해 “막대한 영업 비용을 쓰고도 사업권을 따내지 못한 외국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 및 한국 지사가 이를 면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장비 공급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다 보니, 공급권을 가진 국내 기업과의 합작법인 설립을 목숨 걸고 추진하게 됐다. 3G 분야에서 장비 라인업이 부족했던 국내 기업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얘기가 꽤 신빙성 있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가 불가능한 ‘설’이어서 당시에 기사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중심 김재철>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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