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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여성의 CEO 등극, 대한민국에서 정당한가?

@사람중심 2012. 8. 2. 07:14

“기혼자인데, 아이는 언제쯤 가질 생각입니까?”

“1년 쯤 뒤에 아이를 가질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서는 뽑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저는 몇 달 후 아이를 낳게 됩니다. 출산 휴가도 갈 계획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우리 회사의 CEO를 맡아주세요.”


새 직장을 얻고자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이 같은 대화가 오간다면, 두 사회(또는 조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차이는 그 조직의 경쟁력, 영속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최근 야후가 구글의 마리사 메이어 부사장을 새로운 CEO로 영입했습니다. 마리사 메이어는 구글의 첫번째 여성 엔지니어로, 구글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자문을 하는 핵심 경영진 중 한 명입니다.


그는 구글의 첫번째 여성 엔지니어이자, 사번 20번의 초창기 멤버라는 상징성 만큼이나, 구글의 오늘날을 만든 일등공신 중 한 사람으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구글의 검색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G메일, 구글 뉴스, 구글 이미지 등을 설계해 ‘검색의 제왕 구글’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마리사 메이어입니다. 그는 또 야후 합류 전까지 구글 맵, 구글 어스, 구글 스트리트뷰 같은 위치기반서비스 사업을 총괄해 왔습니다.


37세의 임신한 젊은 여성을 CEO로 선택한다?

언론들은 마리사 메이어가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규모 조직을 이끌고 경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고, 구글 내부 파워게임에서 밀려난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의 CEO 제의를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구글의 오늘날을 있게 한 핵심 엔지니어이자 전략가인 마리사 메이어가 과연 기울어 가는 야후를 회생시킬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후의 강점인 e-메일과 금융·스포츠 부문에 전력을 집중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입니다.


포춘 500대 기업 가운데 여성이 CEO를 맡고 있는 회사는 20개 뿐이라고 합니다. IT 기업은 그나마 남성과 여성 CEO의 비중이 3:1 정도 된다고 하는군요. 상대적으로 여성의 능력이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 CEO가 되면서 실리콘밸리에는 멕 휘트먼 HP CEO, 버지니아 로메티 IBM CEO, 페이스북의 셰릴 샌드버그 COO(최고운영책임자)의 뒤를 잇는 또 한 명의 거물 여성 경영인이 탄생하게 됐습니다(지금은 은퇴했지만,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파트리샤 루소나 HP의 칼리 피오리나 같은 여성 CEO도 있었습니다).


언론은 ‘검색의 제왕’ 구글의 핵심 인물이 ‘검색의 원조’ 야후의 CEO로 이직한다는 데 뉴스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구도가 아닐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마리사 메이어 소식과 관련해 제가 만나는 국내 IT 업계 지인 중 여성분들의 반응은 초점이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면접을 볼 때 미혼이면 ‘언제 결혼할 거냐?’, 기혼이면 ‘언제 애를 가질 거냐?’를 물어본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언짢은 기분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취업을 하려면 그런 질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해야 된다는군요. 사실 이런 질문은 법으로 금지된 것인데, 남자인 저로서는 겪어본 적이 없는지라 적잖이 놀랐습니다(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도 기자를 뽑을 때 남성을 더 선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면접의 단골 질문…“언제 애를 가질 거냐?”

그러면서 그들은 “외국에서는 출산을 앞두고 있는 사람을 CEO로 영입까지 하는데, 우리는 몇 년 안에 애를 낳을 것인지가 면접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 중 하나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너무 전근대적이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심지어 혼기가 지났는데 아직 결혼을 못한 여성에게는 “왜 아직 결혼 못했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군요.


“결혼이나 임신 여부를 묻는 것은 미국에서는 면접을 볼 때 법적으로 금지된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놓고 물어보는 질문이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임신한 여성이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부당한 요구나 무리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건 아닌지요.


마리사 메이어는 현재 임신 7개월입니다. 불과 석달 뒤면 출산휴가를 갈 계획인데, 야후는 이런 계획도 모두 존중해 주었습니다. 연봉은 5년 간 최대 7000만 달러(약 800억원). 야후의 전임 CEO들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라네요. 그는 미국 나이로  이제 겨우 37살입니다(75년생). 나이가 중요한 조건은 아니지만, 미국 대기업 CEO들의 평균 연령이 56.5세라고 하니, 무려 스무 살이나 어립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섬세하다느니, 감성이 풍부하다느니 하는 잣대로 여성이 남성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롭고, 결단력 있고, 비즈니스 감각이 좋은가’로 평가받는 것인지, 성별이 그 능력을 좌우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야후의 마리사 메이어 선임은 분명 그녀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겁니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할 CEO가 아니라, 서비스와 콘텐츠 혁신을 담당할 인물을 선임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야후가 구글과 페이스북에 많이 밀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월 방문자가 7억명 이상이고, 평균 이용시간이 2시간이 넘을 만큼 안정된 사용추이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 어떤 서비스·콘텐츠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재고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좀 지난 것이기는 하지만, 임신·출산과 관련해 여성들이 겪고 있는 고충이 어떨지 짐작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2008 평등의 전화 성차별 상담 사례’에 따르면 임신·출산으로 인한 불이익과 해고 사례가 71%(임신출산 불이익 15.3%, 임신출산 해고 55.7%)를 차지해 2007년 보다 11.8%나 늘었습니다. 경제 위기시에는 대기업에서도 여성의 승진을 배제하고, 출산휴가를 가면 불이익을 주는 사례도 많다고 합니다.


인적 자원의 절반은 성별로 평가한다?

하지만, 마리사 메이어 뉴스를 계기로 여성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면서, 적어도 우리 사회는 능력보다 성별을 먼저 따지는 폐단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첨단을 달린다는 IT 분야가 이 정도이니, 다른 산업 분야는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원인데, 어쩌면 우리는 그 자원 중 어느 한 부분은 아예 그 가치를 확인하기도 전에 사장시키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런데, 마리사 메이어의 야후 CEO 선임 기사를 검색하다가 문득 기사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만고만한 기사 제목들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은 기사 제목은 <야후 구하러 간 37세 ‘구글 얼굴 담당 여성’(조선일보)>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37세의 임신한 여성을, 입사 후 3개월 만에 출산휴가까지 보장하면서, 800억원에 가까운 연봉을 책정할 만큼 여성의 능력과 역할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유명 신문의 기사 제목은...... ‘여성의 역할을 평가하는 두 사회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낚시’를 하기 위한 제목이었다고 해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임신을 앞둔 젊은 여성의 대기업 CEO 등극. 과연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해지는 날은 언제일까요? 아! 이 질문에는 전제가 있군요. 바로 <기업주의 친족이 아닌> 입니다. 이 조건을 달면, 영영 불가능해지는 걸까요?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