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자동차 와이퍼를 개발한 밥 컨즈라는 사람이 이 특허를 가로챈 포드자동차와 벌였던 법적 분쟁을 다룬 ‘플래시 오브 지니어스(Flash Of Geniu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다룬 영화인데, 주인공의 자동차 업계의 공룡과 싸우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닙니다. 발명특허도 빼앗기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품위도 무너져 내린 가장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 아버지로 인정받고 싶은 뿐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실제 소송에서도 명예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업과 개인의 소송에서라면 가능할 법도 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업과 기업의 특허 소송은 감동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수십 수백억을 물어 내야 될 지도 모르고, ‘남의 것을 도용하는 3류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더 큰일이니까요.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특허 침해 소송에서 압승을 거뒀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 배심원단은 미국 시간으로 지난 24일, 삼성전자가 애플의 특허 다섯 건을 침해했다며, 19억 5183만 달러(약 1조 2000억원)를 배상하라고 평결을 내렸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또, 애플은 삼성전자의 통신 특허를 침해하지 않은 것으로 평결했습니다.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축소하는 ‘멀티터치 줌’ 특허와 스마트폰에 저장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검색할 때 맨 마지막 사진에 도달하면 화면이 더 이상 넘어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용수철처럼 튕겨나오게 하는 ‘바운스 백(bounce back)’ 특허 등 5건의 특허를 삼성전자가 침해했다는 것이 미국 법원의 판단입니다.
특허 위세 과시한 애플, ‘카피캣’ 이미지로 타격 입은 삼성
이번 소송이 ‘애플의 압승’, ‘삼성의 완패’로 평가되는 것은 애플이 주장한 특허는 7건 가운데 6건이 받아들여졌고, 삼성전자가 주장한 특허 5건은 모두 기각됐기 때문입니다. 평결에 고무된 애플은 “(이번 평결은) 삼성전자의 모방 정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줬다”고 은근슬쩍 비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제품은 고객들을 위한 것이지, 경쟁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에 앞서 지난 24일(한국시간), 서울중앙지법 민사 11부는 애플이 삼성전자의 통신기술 특허 2건을 침범했고, 삼성전자는 애플의 사용자 환경(UI) 특허 1건을 침해했다면서 아이폰4와 갤럭시S2의 판매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에서는 애플이 삼성전자에 4000만원을, 삼성전자는 애플에 2500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판결에서는 삼성전자의 데이터 전송 시 전력 사용량을 줄이면서도 통화 품질을 유지하는 기술과 전송 오류를 개선하기 위해 송신 데이터를 조합하는 특허를 애플이 침해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반면, 삼성전자는 애플의 ‘바운스 백(bounce back)’ 특허를 침범한 것으로 봤습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미국 법원의 판결에서 삼성전자는 ‘카피캣(copycat)’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습니다. 단지 애플의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모방하는 회사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카피캣’은 스티브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으로, 자사 제품의 디자인에 자부심이 강했던 잡스는 생전에 삼성 제품이 유독 자사 디자인을 많이 모방하는 것으로 보고 자주 공격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구글도 여러 차례 삼성에 경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내 언론, 정확한 사실 보도 결여됐다” 지적도
그런데, 미국 법원의 배심원 평경을 놓고 상당수의 국내 언론들은 ‘삼성전자와 애플이 각자의 안방에서 1승씩을 챙겼다’거나, ‘(두 회사의 소송이) 자신들의 본토인 한국과 미국에서 다소 상이한 판결이 나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규모나 상징성이 비교가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사실 국내 법원에서 쟁점이 된 아이폰4나 갤럭시S2는 이미 두 회사의 주력 모델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정우성 변리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내 언론은 삼성과 애플의 소송을 기업의 자존심이 걸린 감정싸움으로 몰아갔고, 가처분 신청 결과를 놓고도 삼성에 유리한 해석을 내놓았다. 법적 소송인 만큼 언론 보도를 할 때는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지난 9월 네덜란드 헤이그법원에서 삼성 제품의 판매금지 결정을 내렸는데도, 애플의 10가지 주장 가운데 1가지만 인정한 것을 두고 ‘사실상 삼성 승리’라고 해석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습니다.
관련 기사 - "사실상 삼성 승리? 국내 언론 사실 왜곡" (오마이뉴스)
미국 법원의 배심원 평결이 있은 뒤에도 이 같은 논조는 이어지고 있는데, ‘세계 스마트폰시장 ‘애플세’ 비상’ 같은 점잖은 우려는 그나마 양반입니다. ‘9명의 미 배심원들 복잡한 통신특허 알긴 아나?’, ‘삼성,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에 울다’ 처럼, 감정이 실린 듯한 제목 보다는 정확한 사실관계와 향후 소송 전망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보도가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24일의 배심원 평결이 미국 법원의 최종 판결을 아닙니다만, 이번 소송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9개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30여 건의 소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미국 법원에서 애플의 승리는 안드로이드 진영 전체를 견제하는 효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안드로이 OS를 사용하는 모바일 단말 제조사 가운데 1위를 달리는 기업을 상대로 기선제압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미 애플은 다른 제조사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에 대비해 통신장비 기업 노텔이 특허를 인수한 바 있습니다. 노텔 특허 인수를 놓고 애플과 경쟁을 펼쳤던 구글은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했죠.
구글의 e메일이 이번 특허 본안 소송에서 삼성전자가 완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벨빈 호건 배심원단 대표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전자가 실제 애플을 모방했는지가 소송의 쟁점이었다. 이를 판단하는 데 구글이 삼성에 보낸 이메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하기도 했습니다. 이 e메일은 2010년 2월 15일에 삼성전자 선임 디자이너가 구글과 회의를 가진 뒤 30여명의 삼성 직원에게 ‘구글이 삼성 태블릿PC 모델이 애플과 유사하니 구별될 수 있도록 다르게 디자인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죠.
MS 윈도폰, 어부지리 승자?
한편, 전문가들은 이번 특허전의 여파로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이득을 볼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MS의 윈도폰이 OS는 물론이고, UI,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애플 제품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애플이 삼성전자 외에 다른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제조사들을 상대로도 특허 소송을 제기한 상황에서 제조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최악의 경우 판매금지를 당한다면 당연히 윈도폰에 보다 힘을 실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와 관련해 시장분석 전문업체 IDC의 알 힐와 애널리스트는 "이번 판결은 아시아 지역의 모바일 단말 제조사들이 안드로이드 OS에 쏠렸던 지형도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향후 구글과 MS가 모바일 OS가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IDC는 윈도폰 OS가 2016년까지 연평균 46%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는데, 이번 재판 결과 성장세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는군요.
특허와 관련된 소송은 ‘어떻게 이길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고 악수를 하면서 마무리해야 비즈니스 측면에서 윈-윈하는 소송이라는 것이죠.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이 애플 팀 쿡 CEO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이나, 두 회사 사이에 향후 몇 년 동안 반도체 수급 계약이 맺어져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결국 ‘우아한 악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과연 삼성전자는 우아한 악수를 위해 어떤 카드를 내놓게 될까요? 혹시 이번 평결이 삼성전자의 윈도폰8 탑재 스마트폰 출시 전략을 강화하는 계기는 되지 않을까요? 법적인 공방 자체는 어렵지만, 스마트폰 시장을 둘러싼 줄다리기는 보통 사람의 눈에도 꽤 흥미진진합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