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한 기업의 흥망성쇠를 목격한다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런데 겨우 13년 남짓 IT 기자 생활을 한 제가, 호시절을 구가하던 한 기업이 완전히 분해되어 흔적이 사라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IT 기술의 발전과 세상의 변화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텔 네트웍스. 한 때 통신용 네트워킹 분야에서도, 기업 네트워킹 분야에서도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려놓았던 회사입니다. 그런데 불과 2~3년 사이에 이 회사는 완전히 추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제각각 한 분야를 주름잡았던 노텔의 사업부문들은 이제 여러 회사에 매각되었고, 노텔이라는 회사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노텔의 공준분해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장 덩치가 컸던 무선통신 사업부는 우선 3G 액세스 분야가 알카텔-루슨트에 넘어 갔습니다. 그런 다음 백본 사업은 노키아-지멘스와 에릭슨의 경쟁 끝에 에릭슨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국내 무선통신 시스템 시장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에릭슨은 2~3위 업체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전세계 무선통신 인프라 시장에서 부동의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간 명함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장비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국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노텔의 무선통신 사업에 이어, 노텔이 가지고 있던 LG-노텔 지분 50%+1주까지 인수함으로써 LG-에릭슨이 만들어졌고, 지금은 국내 이동통신 시스템 분야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노텔의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팔려 나간 것은 L4~L7 스위치 사업부였던 알테온이었습니다. 알테온은 2000년대 초반 노텔이 인수한 기업이었는데, OS의 안정성과 운용하기 쉽다는 장점을 앞세워 국내 L4~L7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알테온 역시 국내에서는 LG-노텔과 손을 잡았는데, 이 사업은 라드웨어가 인수해 현재의 라드웨어코리아가 국내 L4~L7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근간이 됐습니다. 라드웨어는 자사 하드웨어에 알테온 OS를 결합한 장비의 이름도 알테온으로 정했습니다.
LG-노텔은 알테온이 라드웨어에 인수된 이후에도 이 사업을 계속할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이후 시트릭스시스템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과거 노텔이 영화를 누리던 시기에 한 축을 담당했던 데이터 네트워킹 사업은 어바이어에 인수됐습니다. 어바이어는 루슨트에서 떨어져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사의 데이터 네트워크 브랜드인 ‘케이준’ 사업을 접었던 과거가 있기에, 노텔의 데이터 네트워크 사업부문을 인수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됐습니다.
그 하나는 IP 텔레포니, UC 사업을 하는 데 있어 데이터 네트워킹 장비가 없는 것이 시스코, 알카텔-루슨트와 비교했을 때 약점이 되었기에 인수하게 됐다는 분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바이어를 쥐고 있는 사모펀드가 몸값을 높이고자 인수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노텔 데이터 네트워크 사업 인수 초기에 어바이어는 노텔이 해오던 사업 및 R&D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등 전략을 소개하는 데 열의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그 이후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노텔 데이터 네트워크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스위치 분야는 국내에도 적지 않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스위치 벤더가 옛 노텔 고객을 노리는 형국입니다.
스위치는 장비의 성능 차이가 크지 않고 공급업체는 많아서 가격 경쟁이 치열한 분야인데, 어바이어 인수 이후에 가격 정책에서 유연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입니다. 업계 선두권인 IP 텔레포니 분야에서 해왔던 고가 정책을 스위치 사업에서 고수하는 것은 패착이라는 게 국내 NI 업체들의 지적입니다.
노텔의 데이터 네트워크 사업 역시 국내에서는 LG-노텔이 해왔는데, LG-에릭슨은 올해 초 어바이어와 파트너 관계를 정리하고, 브로케이드로부터 데이터 네트워크 장비를 OEM 방식으로 공급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노텔이 해오던 비즈니스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던 광전송 사업과 관련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노텔의 광전송 사업을 인수한 시에나가 국내 지사 정비 및 독자적인 사업전략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시에나는 국내에서 LG-노텔을 통해 대부분의 비즈니스를 해왔는데, 에릭슨도 광전송 사업부가 있던 관계로 제휴를 끝내고 독자 행보에 나서게 됐습니다. 시에나는 노텔이 그간 확보한 고객 기반이 자신들의 비즈니스 성장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업부문을 매각한 노텔은 지적재산권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지난 7월 1일(현지시간) 특허 6000건과 특허응용 기술을 애플과 EMC, 에릭슨, MS, 리서치인모션(RIM), 소니 등 6개사가 참여한 컨소시엄에 현금 45억 달러를 받고 매각했습니다. 이 컨소시엄은 구글과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노텔이 보유했던 WiFi, LTE 등 무선 및 반도체 그리고 소셜네트워킹 기술 특허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따지고 보면 노텔은 과거에 에릭슨, 알카텔, 루슨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기업이었습니다. 통신사용 장비와 기업용 장비를 모두 보유했고, 각각의 사업이 모두 정상권에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북미의 톱 벤더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이었죠.
베이네트웍스를 인수한 데이터 네트워크 분야, 포트 수로는 세계 1위를 달리던 IP 교환기 분야, MSPP 표준을 주도하던 광전송 분야, UMTS 기술 혁신을 주도하던 이동통신 시스템 분야 모두 ‘한가락하던’ 비즈니스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저마다의 사업들이 하나둘씩 매각되기 시작해 이제 노텔의 흔적은 과거 노텔 코리아에 몸담았던 사람들과의 추억 속에서나 존재합니다. 간혹 고객 사이트를 방문했다가 마주치게 되는 노텔 스위치/교환기도 머지않아 다른 브랜드로 교체되겠죠.
노텔은 아마 과거 정점에 올랐던 통신장비 공급업체 가운데 완전히 해체된 첫 번째 기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노텔의 사업이 여러 기업에게 인수되어 그 기업들의 비즈니스를 강화시키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룡 같던 기업의 흥망성쇠가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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