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천재지변이나 대형 사고 등 비상 상황에서 공공기관의 통신을 하나로 묶는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구축 사업이 자가망을 주축으로 하면서, 상용망을 보조망으로 연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한국전자파학회는 지난 주말 재난망 2차 설명회를 열고 ▲와이브로 기반 자가망에 상용망 보완 ▲테트라 기반 자가망에 상용망 보완 및 연결이라는 두 가지 안을 내놓았습니다.
2012년. 국가재난망 검토 10돌
원래 국가재난망 구축은 2003년 2월에 일어난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이후 필요성이 제기돼 당시 정보통신부의 기술 검토를 거쳐 주파수 공용 통신 기술인 테트라(TETRA) 자가망 구축이 결정되었습니다. 재난망에 필요한 기술을 높은 수준에서 구현하고 있는데다, 국가재난망을 구축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기술을 사용 중이고, 우리나라 경찰 조직도 대부분 테트라 자가망을 구축해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08년 들어 갑자기 '특정 기업 특혜' 논란이 일더니, 사업이 중단됐습니다. 여러 기업의 통신시스템을 복수로 도입하지 않고 왜 특정 기업 시스템만으로 망을 구축하냐는 지적이 일어난 것이 논란의 불을 지폈는데, 사실상 이 지적은 '지적을 위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테트라 기술로 재난통신망을 구축하면서 복수 기업의 시스템을 연결해서 쓰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테트라 기술이 널리 보급돼 있는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 테트라 재난통신망 구축 국가 가운데, 복수의 시스템을 연동한 사례가 없었던 이유는 '재난통신망에 특화된 기능'에 있습니다. 국가재난 시 여러 공공기관이 원활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상황이 위급한 쪽에서 다른 재난망 이용자들의 통신에 끼어들 수 있는 '가로채기 통화', 명령 계통에 맞게 통화의 우선권을 주는 '우선순위 통화' 같은 기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조직이 섞여 있는 특성상 우왕좌왕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업의 시스템은 이런 기능이 지원되고, 어떤 기업의 시스템은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기업의 시스템을 연동하면, 결국 기능이 부족한 쪽에 맞춰서 운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일 기업의 시스템으로 망을 구축하는 것은 재난망 본래의 효용가치를 살리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죠.
범국가재난통신망 구축, 목적을 잃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논란이 됐다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국가재난망이 구축돼 있지 않은 나라입니다. 외국에서는 재난망이 얼마나 잘 갖춰졌느냐가 복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복지후진국에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난이 일어나면 국민 스스로 알아서 대응해야 되는 것일까요?
2010년, 재난망 검토의 중심에 '와이브로(WiBRO)'라는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연구 결과, 와이브로 기반으로 재난망에 꼭 필요한 기능을 개발하려면 5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기술 개발에 힘을 쏟으면 1~2년이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한마디였습니다. '연구결과는 5년 걸린다지만, 잘 하면 2년만에도 개발할지 모른다'는 이유 없는 전망 때문에 '국가재난망이 없는 나라의 국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절대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었을까요?
지난해 부터는 통신사들이 상용망, 즉 자신들이 이미 구축해놓은 이동통신망을 재난망으로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성명서도 냈죠. 통신사들이 상용망 이용을 주장하는 이유는 누가 봐도 명백합니다. 하지만, 왜 전세계 나라들이 상용망을 이용하지 않고 자가망을 구축할까요? '국가재난망'이라는 용어는 괜히 만들어진 것일까요? 어쩌면 국가재난망을 구축한 그 수많은 나라들이 모두 다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거나, 어떤 나쁜 의도로 거액의 예산을 낭비하는 정책을 밀어붙인 것일까요?
복지의 가치 vs. 경제적 가치?
그리고, 드디어 지난 주말 자가망+상용망이라는 큰 그림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자가망 기술 가운데 하나로 '와이브로 자가망'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섣부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자가망 구축의 큰 그림은 '누이좋고 매부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애초 국가재난망이 검토될 때의 문제의식들은 사라진 채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 끼어든 주장들이 떡하니 안방을 꿰차고 앉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업계에서는 "2차 설명회에서 발표된 연구결과는 결론이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는 지적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자가망의 두 후보 가운데, 테트라가 포함된 것은 여론을 의식한 것일 뿐 사실은 와이브로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 언론은 행안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사의 발언을 소개했는데, "공무원 입장에서는 와이브로가 채택돼야 정책적, 산업적으로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반대로 국내에서 와이브로를 들러리 세우는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는 않습니다(-특정 기업의 위상이기도 한- 와이브로의 위상을 고려했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과정을 보면 정부가 재난망의 가치나 목표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난망의 경제적 가치를 찾으려는 쪽의 입장까지 함께 고려하다 보니 사업이 계속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2008년 '특정 기업 몰아주기' 논란이 나왔을 당시에 이 때문에 재난망 예산이 많아졌다는 비난도 있었는데, 당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재난 시 도서, 산간 지역의 통신을 보장할 수 있도록 투자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습비다. 2010년 여름 태풍 '곤파스'가 불어닥쳤을 때는 도심에서조차 통신이 두절돼 통신사들이 복구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재난망이 구축돼 있었다면 어땠을까', '도서, 산간 지역에 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2012년. 국가재난망이 검토되기 시작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과연 우리 국민은 언제쯤이면 대규모 국가 재난이 일어나더라도 여기에 대응하는 통신체계가 갖춰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10년 동안 대규모 재난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관련 기사 -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 국가재난망 또 재검토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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