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네트워크&통신/유선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스위칭 시장의 단상…다윗과 골리앗

【사람중심】 연말이 되니 한 해의 성과를 보여주는 이런저런 보도자료가 많이 들어옵니다. 매출과 관련한 것도 있고, 어떤 상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글로벌 IT 기업들이 가장 강조하는 자료 중 하나가 아마 가트너의 ‘매직 쿼드런트(Magic Quadrant)’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시장분석기관이 만들어낸 것인데다가, 매년 꾸준히 발표되어 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신력을 인정받는 자료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2월 들어 몇몇 업체가 보낸 가트너 매직 쿼드런트 자료를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웹 가속기라고 부르던 애플리케이션 딜리버리 콘트롤러(ADC) 분야 전문 업체들을 평가한 것이었는데요, 가장 앞서 있는 기업들로 평가받은 리더(leaders) 그룹에는 딱 3개 업체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 주인공들은 바로 F5네트웍스와 시트릭스시스템스, 라드웨어입니다.

F5 네트웍스는 워낙 오랫동안 글로벌 ADC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했던 기업이고, 스위칭 성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시트릭스와 OS의 안정성을 인정받고 있는 라드웨어는 최근 이 시장의 강자 그룹으로 입지를 탄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Magic Quadrant for Application Delivery Controllers’ 자료를 보면서 정작 놀라웠던 점은 IP네트워크의 영원한 강자 시스코시스템즈가 리더 그룹에서 빠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시스코는 리더 그룹을 뒤쫓는 도전자(challengers) 그룹이나, 앞으로 전망이 좋을 것으로 평가받는 비전(visionaries) 그룹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가트너는 시스코를 상대적으로 가장 평가가 낮다고 할 수 있는 니치 플레이어(niche players) 그룹에 포함시켰습니다.


니치 플레이어라... ‘틈새시장 공략 그룹’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주류 시장에서 경쟁하기는 시기상조이고, 메이저 그룹이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는 시장에서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기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시스코가 끼어 있다는 점이 의아한 것이죠.

그래서 제가 이제껏 이 자료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올해 이러한 결과가 처음 나온 것인지 궁금해 지난해 ADC 분야 매직 쿼드런트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자료에도 역시 시스코는 니치 플레이어에 속해 있더군요.

내친 김에 지난해와 달라진 점을 비교해 보니, 우선 2009년에 비전 그룹의 맨 꼭대기(리더 그룹과의 경계선 바로 아래)에 걸쳐 있었던 라드웨어가 리더 그룹으로 도약했습니다. 아마, 알테온을 인수한 뒤 알테온의 안정적인 운영체제에 자신들의 강점이었던 용량·성능이 결합된 새 ADC 제품을 성공리에 런칭했고, 가상화 부문에서 여러 비전들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해에도 도전자 그룹에 속한 기업은 없었고, 앞으로의 기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는 비전 그룹은 라드웨어와 제우스네크놀로지가 있었는데 올해 그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액티브네트웍스(ActiveNetworks), 스트레인지루프(Strangeloop), 앱티마이즈(Aptimize) 3개 회사가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사실 이 3개 회사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벤더들인데, 역시나 선발 주자들과 격차를 줄이고 차별화를 꾀해야 하는 후발 주자들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트렌드를 끌고 나가는 역동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변화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니치 플레이어 그룹은 지난해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림에서 봤을 때 한두 업체의 위치가 조금씩 이동한 것을 제외하면, 업체의 수도 이름도 모두 그대로입니다. 이 그룹에는 시스코 외에도 브로케이드(옛 파운드리 네트웍스), A10 네트웍스, 바라쿠다 네트웍스, 크레센도 네트웍스, 어레이 네트웍스 처럼 ADC 분야에서 자주 봐 왔던 이름들이 속해 있습니다.


니치 플레이어 그룹의 다른 벤더들은 차치하고, 시스코가 이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의외라고 해야 할까요,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당연히 선두 그룹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작년부터 니치 플레이어로 떨어져 있었다고 하니 왠지 시스코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한발만 뒤로 물러나서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런 사례는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덩치도 작고 지명도도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특정 분야에만 집중하는 기업들이 유명 IT 기업들보다 앞서는 사례 말입니다.

WiFi 전문 업체들이 대형 네트워크 장비 업체들 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보여주는 것이나, 가상화 관리 분야에 먼저 투자해온 기업들이 유명 IT 성능 관리 전문 업체들 보다 먼저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장을 열어가는 사례들은 실력과 덩치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네트워크 전문 업체로부터 WiFi와 관련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이 업체는 유명 네트워크 장비 공급 업체의 유력 파트너 중 하나로 모 지자체의 WiFi 사업에 참여했는데, 자사가 공급하는 유명 벤더의 WiFi 성능이 WiFi 전문 업체와 비교해 적지 않은 격차를 보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벤더가 정치력을 발휘해 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한 분야에만 집중하는 기업은 그것이 선택과 집중의 전략 때문이든, ‘이것밖에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든 전력투구하게 됩니다. 해당 분야가 태동하던 시기에 많은 업체들이 난립했다가 결국 몇몇만 남고 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는 말처럼, IT 업계에서, 유명 기업들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특정 분야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기업들은 분명 그들만의 주특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ADC 얘기로 돌아와서, 가트너는 ‘가상화 데이터센터와 관련된 능력 및 비전’이 시트릭스나 라드웨어를 리더 그룹으로 뽑은 이유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IT 시장의 가장 뜨거운 주제와 관련해 남들과 다른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리더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지금껏 열심히 주특기를 연마해왔음은 물론, 앞으로도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기술과 지략이 덩치를 이겨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가격으로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들이 더욱 유리하고, 기술과 지략이 있는 기업들은 덩치 큰 기업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시장에 덩치 큰 기업들만 있어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날쌔고 개인기가 좋은 가드는 없이 센터만 있는 농구는 생각만 해도 지루합니다. 기술과 작전이 중요하지 않은 농구 경기, 키가 곧 기술이고 작전인 농구 경기가 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덩치 큰 IT 기업을 괴롭히는 다윗들이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