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어제 저녁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중에 ‘삼성전자의 문제점...’ 어쩌고 하는 얘기가 들려서 무슨 얘기인가 하고 방송 내용에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꽤 흥미로우면서도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KBS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매주 화요일 10시에 방영되는 <시사기획 KBS 10>이라는 이름의 시사다큐멘터리입니다. 이날 방송 제목은 ‘야근 권하는 사회’였고요.
방송을 중간부터 보게 되어 기획 의도를 100%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느낀 방송의 주제는 ‘work smart’였습니다. 최근에 많이 쓰는 스마트 워크의 의미(IT를 활용해 시간·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한다는)와는 다르게, ‘창의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신선했습니다(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날 방송분을 찾아보시면 시간이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 5월 17일<KBS 10> 바로가기).
애플을 부러워한 삼성
저는 마지막 15분 정도를 봤는데 계속 삼성전자와 애플을 비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홈페이지의 주요 내용 소개를 보니 도요타, 파나소닉, 포스코, LG의 사례들도 소개가 되었던 모양인데, 제가 본 뒷부분은 두 회사를 집중 비교하며 창의적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일할 때 얼마나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거기다 최근 KBS의 분위기에서 삼성전자의 일하는 문화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고 놀랐는데, 프로그램 기획 의도를 보니 ‘현장감 있는 취재와 심층적 분석을 담은 탐사기획물 지향’,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모순을 성역 없이 고발’, ‘한국사회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는 Agenda setting 역할을 다한다’고 표방하고 있네요).
방송 내용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MP3 플레이어(아이팟)에서 시작해 스마트폰(아이폰), TV로 넘어오면서 계속되는 애플의 성공을 삼성전자가 매우 부러워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드웨어 만드느라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애플은 왜 만드는 것마다 잘 팔리고, 앱스토어 만들어서 또다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한번 써본 사람은 계속 애플만 쓰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생고생해서 제품을 만들어도 수익이 얼마 안 되는데, 애플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수익을 올리냐?”고 고민하던 삼성전자가 몇 해 전에 애플을 따라잡기 위한 팀을 만들었던 모양입니다(팀이나 프로젝트 이름이 소개되지는 않았습니다).
방송 가운데 이 팀에 소속됐던 전 삼성전자 직원의 인터뷰 분량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얘기인즉슨 약 400명의 인원에 4,000억원 가량의 비용을 투입해 100여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제대로 성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혁신과 창의성이 인정받는가?
그리고 이처럼 큰 실패를 본 이유로 ‘임원이 시키는 것만 해야 되는 문화’를 꼽았습니다. 임원이 “올해 언제까지 단말 몇 종류 개발해”라고 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갈수록 개별 팀 리더인 임원이 사고하는 것 이상으로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어졌다는군요. 뭔가 새로운 방식,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면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원들은 임원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나 봅니다. 1년마다 실적 평가를 받아 보니, 1년 안에 승부를 낼 수 있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매년 그 해의 실적으로 평가를 받아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다면, 창의적이거나 새로운 시도에 자신의 일자리를 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만 추진하게 되는 것이죠.
(이 대목에서는 예전에 한 ETRI 관계자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통합이 추진되던 때였는데, “정보통신부가 산업자원부는 물론이고, 과학기술부에도 뒤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IT 839 같은 과제를 추지할 때 1년 단위로 평가하기 때문이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지적이었습니다.
3년짜리 프로젝트인데도 1년마다 중간 결과를 평가해서 다음 해에도 프로젝트를 계속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어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측가능한 결과물’만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민간 연구소들보다 핵심 기술에서 뒤지는 이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에 반해 당시 과학기술부는 개별 프로젝트에 5년의 기간을 주고, 3년이 될 때까지는 매년 문서 위주로 점검을 하고, 어드바이스를 하는 식으로 자율을 주다가, 4/5년 차에 1/2차 결과물을 평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좀 더 길게 보고 연구개발을 할 수 있다고 부러워하더군요.)
'단기 실적'의 굴레
방송은 여러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삼성전자가 단기적인 실적만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보다 새롭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제이 엘리엇 전 애플 부사장의 인터뷰도 있었습니다. 제이 엘리엇은 “하드웨어에만 치중하는 삼성은 한때 워크맨으로 휴대용 뮤직플레이어 시장을 석권했으나 이제는 몰락해버린 소니의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삼성은 제품을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어떻게 팔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면서, “백화점에 가면 15가지의 삼성 TV가 있는데 소비자가 이 제품들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해서 선택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방송의 결론은 “야근을 많이 하는 것이 훌륭한 직원인 양 인식되고,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해 나가는 데 치중해서는 진정한 일류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새로 발명하겠다?”
방송을 보고 나니 얼마 전에 읽은 ‘스티브 잡스의 위기 돌파력’이라는 책이 생각나 다시 펼쳐 보게 됐습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움직이는’이라는 수식이 붙어 있는 이 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불행을 겪었던 CEO 스티브 잡스가 오늘의 성공에 도달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집중 분석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한 때 애플에서 일하기도 했던 필자가 보는 성공의 열쇠는 ‘파격과 혁신’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 직원들에게 ‘언제까지 어떤 것을 개발하라’고 지시를 내리기 보다는 ‘우주에 충격을 주자’거나, ‘세계를 놀라게 할 제품을 만들자’, ‘미술관에 전시될 디자인을 해보라’고 말해 개발자들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개발자들이나 기획자들보다 한발 앞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케이블로 연결하면 안 된다’, ‘맥이 책상 위에서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면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이 맥PC의 대명사인 ‘올인원’ PC를 만들어낸 시초였다고 합니다.
2001년 아이팟을 처음 출시할 때 컴퓨터 제조사가 왜 MP3P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MP3P 시장에는 아직 마켓 리더가 없다. 아무도 성공의 레시피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고, 2007년 아이폰을 발표할 때도 역시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우리는 휴대전화를 새로 발명할 생각이다”는 것이 스티브 잡스의 대답이었습니다.
다른 회사의 성공을 따라 하거나,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한 기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발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들과 다르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문화가 오늘날의 애플을 만든 힘인 것 같습니다.
매출이 아니라, 혁신을 자랑할 수 있는 문화
<KBS 10> 다시보기를 했더니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난 2002년 도요타의 직원인 우치노 씨(30살)가 밤샘 근무 중 숨졌는데 회사는 그의 과로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사망 전 한 달 동안 100시간 이상’ 일한 것을 과로로 보는데, 우치노 씨의 시간외 근무는 45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우치노 씨의 부인인 히로코 씨가 남편이 퇴근할 때 걸었던 휴대전화 통화기록 등을 근거로 시간외 근무가 144시간이라고 반박하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회사 측은 직원들이 퇴근 후 자발적으로 품질개선활동을 했을 뿐 회사 업무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소송 결과 보수를 주지 않는 이른바 ‘서비스 잔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경영 혁신의 최고 사례로 찬사를 받던 도요타의 ‘카이젠(개선)’ 이면에 직원들의 전근대적인 희생이 숨어 있었던 것이죠.
지난 1월 발생한 삼성전자 직원 고 김주현 씨 투신의 밑바탕에도 장시간 노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방송의 지적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상 8시간 4조 3교대 근무가 원칙이지만 하루 12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죠. 김주현 씨는 적지 않은 급여를 받기는 했지만, 기본급은 매우 적었고, 급여의 대부분이 야근, 휴일근무 같은 시간외 수당이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의 파나소닉은 2007년부터 ‘일 다이어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일을 없애고, 관행적인 회의시간을 줄이고, 문서를 간소화하고, 자리를 재배치하는 등의 작은 실천으로 3년 간 183시간의 노동시간을 줄였습니다. 장시간 일하는 것이 미덕이던 관행으로는 새로운 발상과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파나소닉은 현재 5시 정시퇴근이 자리를 잡았고, 밤 10시 이후 심야 야근은 회사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최근에는 국내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합니다. 삼성전자와 포스코는 ‘워크 스마트’를 기치로, LG디스플레이는 ‘출근하고 싶은 직장’을 기치로 근무시간 줄이기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야근을 당연시하는 경직된 직장문화가 이런 혁신 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기업의 경영자나 관리자 입장에서 ‘창의성’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의 가치나 위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창의성’이 가져다 줄 불확실한 결과물 보다는, 단기 실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가 훨씬 크게 다가올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고만고만한 생각을 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군계일학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대기업 가운데서도 단순히 매출의 규모나 ‘몇 년 연속 흑자’ 하는 식의 성과가 아니라, 혁신을 통해 IT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주인공이 탄생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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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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