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전가의 보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傳家寶刀. ‘대대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보검’이라는 뜻인데, 어려운 일에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수단을 가리키는 데 주로 쓰이는 표현이죠.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해서 상황이 불리하거나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들고 나오는 호구책을 ‘전가의 보도’라고 비꼬아 말하곤 합니다. 정부를 향한 여론이 불리할 때 들고 나오는 ‘친서민 정책’이나 기업이 상품 가격을 올릴 때 내거는 ‘원자재 가격 상승’ 같은 것이 대표적인 ‘전가의 보도’가 되겠죠.
‘전가의 보도’는 유서 깊은 가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통신 가문에도 훌륭한 그것이 있습니다. 더욱이 통신 가문에서 사용하는 이 칼은 성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모든 위기에 한결같이 좋은 해결책이 되어줍니다.
통신 가문이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면 적지 않은 수의 언론이 이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아니, 요즘에는 통신 가문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언론사들이 이 칼을 대신 휘둘러 주곤 합니다. 통신 가문에서 언론사에 또 다른 전가의 보도를, 그것도 꾸준히 휘둘러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말 적지 않은 논란 끝에 SK텔레콤이 기본료를 1,000원 내리기로 했습니다. 이번 결과는 이전에 몇차례 있어 왔던 모습의 재현입니다. 과거 발신자번호표시 요금 등 몇몇 사례에서 SK텔레콤이 가장 먼저 요금을 무료로 전환함으로써 다른 통신사들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통위는 출범 당시부터 이동통신 요금인하를 강력하게 어필해 왔습니다. 현 정부의 선거 당시 중요한 공약 중 하나가 ‘통신비 30% 인하’였기 때문이죠. SK텔레콤의 기본료 인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정부 입장에서는 통신비 인하의 물꼬를 텄다는 생색을 낼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물가가 치솟는 것에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서, 뉴스거리가 되는 약간의 통신비 인하에는 집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통신비 인하를 둘러싸고 정부는 적지 않은 비난을 들어 왔습니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을 보면 ‘인하된 금액이 너무 적다. 생색내기냐?’거나, ‘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름값이나 잡아라’하는 내용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언론이 정부를 비판하는 주된 내용은 이와 너무나 상반된 것입니다. 바로 ‘통신비 내리면 안 된다’가 많은 언론들이 풍기는 뉘앙스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론들이 ‘통신비를 내리면 안 된다’고 하는 이유인데, 그 이유가 한결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늘 통신사들이 이야기하던 것이기도 합니다. 통신비가 인하되면 안 된다는 통신사와 언론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1. 통신사가 우리 사회의 기간 인프라에 투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요금이 인하돼서 수익이 낮아지면,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3. 통신사의 투자가 위축되면 통신 분야의 기술·서비스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관련 산업 유발 효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번 요금 인하를 둘러싸고 통신사를 두둔하는 논평이나, 또는 균형감을 지킨다고 하는 기사에서 소개하는 통신사쪽 입장은 오직 이것 한 가지입니다. 통신사들은 요금 인하 외에 약간의 규제나 단속 얘기가 나올 때도 늘 이 같은 3단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언론들이 이 논리를 열심히 대변해 왔습니다. 너무도 훌륭한 ‘전가의 보도’입니다.
‘전가의 보도’가 힘을 발휘한 탓인지 결국 SK텔레콤만 기본요금 1,000원을 내리는데 그쳤습니다. 국민들은 만족스럽지 못한데, 뉴스에서는 ‘적은 금액이지만 통신사 수익이 그만큼 줄어드니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적자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껏 통신사들이 받아 온 그 수많은 혜택들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될까요? 우리나라는 유독 주요 통신사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이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나라입니다. IPTV나 MVNO 정책에서 우리만큼 앞뒤 안 가리고 3대 통신사(어쩌면 2대 통신사) 편들기를 하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대형 통신사들이 남보다 한발 앞선 서비스를 발굴해서 경쟁력을 높이려 하기보다, 광고나 보조금에서 경쟁력을 찾으려는 이유도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누가 감히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울타리 밖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끊임없이 사용자의 요구를 파악해 더 나은 서비스를 발굴하는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미국 이동통신 분야 1위인 버라이존은 가족요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4인 가족 통털어 음성통화 600분에 110달러를 받는데, 가족 간 통화가 무료이기 때문에 600분도 남는다고 하는군요. 타사 가입자도 10달러를 내면 무료 통화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AT&T는 정액요금제에 가입한 고객의 통화량이 남았을 때 다음달로 넘겨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NTT도코모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이동전화+VoIP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단말기(스마트폰이 아닌 일반 휴대폰)를 가장 열심히 공급하는 통신사였습니다. MVNO들이 이동전화+VoIP 단말기를 공동주문해 시장에 바람을 일으키며 고객을 빼앗아 가자, 여기에 적극 대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NTT도코모가 망하거나 휘청거렸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야 MVNO라는 것이 없으니 이런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일반 휴대폰에서 VoIP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규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에 가입한 스마트폰에서 VoIP를 이용하는 걸 가지고도 이런저런 말들이 너무 많은 상황이니까 말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우리보다 물가가 비싼데도 이동통신 이용료는 비슷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혜택이 더 많다는 것이 일본에 자주 오가며 일본 이동전화에 가입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우리 통신사나 일부 언론들이 다른 OECD 나라와 비교해 이동전화 요금이 비슷하거나 조금 싸다고 하는데, 단순히 초당 요금제나 기본료 외에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비교되지 않습니다.
혜택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이 촉발된 환경이라는 뜻일 텐데,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은 울타리를 닫아놓아서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정부가 출범 이후부터 요금 내리라는 압박을 여러 차례 했는데도 이제야 기본료 1,000원이 내려가는 것은 통신사들 스스로 고객의 눈치를 볼 만큼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선심성 정책을 위해 통신사들을 압박하는 것보다, 제대로 된 MVNO 하나가 나와서 기존의 요금 체계나 부가서비스 체계를 한번 흔들어 놓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클 것입니다. 요금 인하 관련 기사에 어떤 네티즌이 ‘쌀 시장도 개방했는데, 이통 시장도 개방하자’고 댓글을 달았더군요. 네티즌도 아는 걸 왜 정부는, 통신 정책만 연구하는 방통위는 모를까요?
1. 통신사가 우리 사회의 기간 인프라에 투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요금이 인하돼서 수익이 낮아지면,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3. 통신사의 투자가 위축되면 통신 분야의 기술·서비스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관련 산업 유발 효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 3단 논법과도 같은 ‘전가의 보도’는 한줄로 요약하면 “요금 내리라고 하면 투자 안 하니까 파급효과가 클 수도 있어”가 될 것입니다. 사회를 향한, 사용자를 향한 협박인 셈입니다. 지금껏 국민이 낸 세금으로 누구보다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통신사들이 그 은혜는 잊고 되려 국민을 협박하는 자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통신 정책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말입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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