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2010년 2월 어느 날 밤.
<김 기자, 바르셀로나에 계시네. 별 일 없으면 호텔 앞에서 맥주 한잔 어떠신가?>
<상무님, 바르셀로나 가셨군요. 저는 서울입니다.>
<통화 괜찮아요?>
<네......>
따르르릉......
“난 또...... MWC에서 무선통신 장비 제조사들 발표 내용을 요약했길래, 행사 참관 온 줄 알았네. 돌아가면 한 번 봅시다.”
2010년 2월 어느 날, 자정이 넘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와 통화 내용입니다.
밤 12시가 넘어서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한 통신장비 제조사 임원과 SMS 몇 통을 주고받았습니다. 곧 이어 이 임원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통화하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내용인즉슨, MWC 현장에서 보니 온통 LTE 시스템이 화두이고, 세계 각국의 통신사들도 LTE서비스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에 초점을 맞춰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1월부터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북유럽 최대 이동통신 사업자 텔리아소네라의 LTE 시범서비스가 시작됐습니다. 유럽의 주요 통신사들은 물론, 미국의 버라이즌, 일본의 NTT도꼬모 같은 CDMA 계열의 대표 통신사들까지 4세대는 LTE로 가겠다는 전략을 발표한 직후였기에 세계 최대 모바일 통신 행사의 화두는 LTE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던 저는 에릭슨, 노키아지멘스, 알카텔-루슨트, 화웨이, 모토로라 같은 통신장비 제조사들에 연락해 본사가 이번 행사에서 어떤 기술 및 전략을 발표하고, 부스를 어떻게 차별화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해서 기사를 썼습니다.
행사에 직접 참관했던 그 임원은 “행사 내용도 LTE 일색이고, 외신은 온통 LTE 기사들로 넘쳐나는데, 우리나라 언론들은 현지에서 보냈다는 기사에서 LTE 시스템 얘기는 찾아볼 수 없고 온통 휴대폰 얘기만 쏟아내더라. 그러다가 LTE 인프라 기사를 보니 반가워서 연락을 했다. 바르셀로나에 온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통화를 하던 우리 둘은 한참을 웃었습니다.
MWC는 CES 재방송? 아니면 후속편?
언제나 그렇듯 이 행사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꽤 비중 있게 참가하고, 많은 기자단을 대동합니다. 그런 만큼 MWC 기간 동안은 IT 전문 매체는 말 할 것도 없고, 방송사, 종합일간지, 경제지까지도 MWC 기사로 도배되기 일쑤입니다. 이미 지난 주 부터 이와 관련된 기사들이 늘어나더니, 일요일부터는 MWC에서 우리 기업들이 뭘 발표하는지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마찬가지군요. 지난 몇 년 간 계속해왔던 레퍼토리 말입니다. 불과 한달 여 전에 CES 참관 기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직후라 딱히 신선할 것도 없는 단말기 관련 내용을 정말 자세히도 보도해줍니다.
물론, 새로 발표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있으니 보도는 해야겠지만, ‘혹시 바르셀로나 행사가 우리나라 기업 단말기 발표 기자간담회였나?’ 착각할 지경입니다. 연초에 있는 CES의 두 축이었던 모바일 기기(스마트폰, 태블릿PC)와 TV 중에서 모바일 기기만을 줌인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세계 최대 모바일 통신 박람회, “우린 단말만 보인다”?
우리나라 언론의 MWC 보도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모바일 기기와 관련 있는 내용만 쓴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100%는 아니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비중으로 봤을 때 95%는 족히 넘을 것입니다. ‘전부 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모바일 기기라는 범주를 넘어 조금 더 큰 의미에서 모바일과 관련된 극히 일부의 전망 관련 보도도 대개는 모바일 기기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제조사 경영진이 얘기한 내용들입니다.
(네이버와 다음의 MWC 기사 검색)
MWC는 말 그대로 모바일 통신 기술의 발전상을 짚어보고, 시장의 미래를 예측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행사의 중심은 모바일 통신 시스템, 솔루션입니다. 또, 통신사들이 어떤 서비스로 차세대 모바일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는 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입니다.
물론, 단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단말이 있어야 서비스가 구현되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당연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단말 행사와 구분해서 모바일 통신 행사가 열리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우리 언론들은 그저 국내 단말 제조사들의 새 단말을 칭송하는 기사를 1~2월 연이어서 폭풍처럼 쏟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만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혹시 신문사마다 1월 CES와 2월 MWC에 참가하는 기자가 다르거나, 발표된 단말들이 너무 좋고 신기해서 그러는 걸까요?).
하지만, 수많은 국내 언론사들이 MWC 현장을 직접 방문해 수백 건의 기사를 쏟아내는 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모바일 통신 행사에서 나온 최신 서비스·기술 트렌드와 올 한해를 예측해 볼 수 있는 각종 정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분석이나 해설 이전에 현장의 발표 내용들만 생생히 보도가 돼도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기사들은 통신·모바일 기술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들은 물론이고,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 국내 관련 기업 및 개발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언론들은 모바일 서비스의 트렌드를 짚어보는 행사를, 언제나처럼 모바일 단말을 집중 보도하는 행사로 재해석합니다. 통신강국이라는 자화자찬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LTE 시스템 전시관에서도 단말만 취재?
우리 기업들 가운데 통신 인프라로 내세울만한 곳이 없으니 행사 시작 전에야 그렇다 하더라도, 행사 현장에서는 얼마든지 취재를 할 수 있는데도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MWC 보도의 극단적 편중 현상을 보면서 ‘언론이 이 좋은 기회를 왜 저렇게 날려버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단말 제조사들이 광고시장에서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을 감안해서 이해를 하려고 해도 아쉬움이 큰 게 사실입니다.
(구글과 줌에서 MWC 기사 검색)
물론, 참가한 기자들이 삼성이나, KT의 전시관 얘기를 한두 꼭지 쓰기는 하지만, 삼성전자의 놀라운 발표작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현지에서 통신사 전시관에 갔으니 한번 소개하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통신 기술 전문 기자가 이 행사에 초청받지 못한 것이 벌써 7~8년이 다 되어 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CES에 참가한 기업들이 꼭 우리 기업·통신사 얘기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2010년 행사에서 기자들이 모토로라, 화웨이 부스를 방문한 기사가 다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이들이 전시한 휴대폰 얘기뿐이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입니다!
당시 화웨이와 모토로라 한국지사에서도 참석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연락을 해보니, 자사 부스들도 모두 새로운 LTE 시스템으로 꾸몄다고 합니다. 물론 단말도 만드는 회사이다 보니 한 귀퉁이 작은 전시대에 새로 나올 단말들을 전시했는데, 우리나라 기자들은 들어와서 그것만 잠깐 둘러보고 나갔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오는 통신사 관계자나 기자들에게 자사의 LTE 기술 및 전략을 설명해주고자 파견된 사람이었지만, 우리 기자들과는 제대로 얘기를 나눠보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모 대학 워크숍에서 만난 놀라운 ‘CES 참관기’
최근 모 대학 창업보육센터 워크샵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CES를 직접 참관한 이 대학 모 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벌써 3년째 고작 10~20개 정도의 가난한 벤처들을 위해 자신이 CES를 샅샅이 훑고 다닌 자료들을 총정리해서 최신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표 내용이 놀라웠습니다. ‘CES는 가전 행사이니, 단말 중심의 보도가 어쩔 수 없지 뭐..’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차세대 WiFi와 이를 활용한 가정 내에서의 콘텐츠 다중 송수신 기술, 차세대 투명 디스플레이와 통신 서비스·앱의 결합, 자동차 계기판 및 전면 유리와 지능형 디스플레이의 결합, 차세대 메모리, 새로운 해상도의 콘텐츠가 몰고 올 디스플레이·스마트폰·메모리 시장의 변화...... 우리 언론의 보도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었던 얘기가 수두룩했습니다. 발표자는 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행사에 참가하면 당연히 이런 내용들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아래 사진들은 발표 내용을 짜집기한 것입니다).
그는 강의 마지막에 “올해 행사에서 가장 강하게 받은 느낌은 CES가 볼 것이 없어졌다는 거다. 내년에는 참석 안 하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화려한 디스플레이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아주 혁신적인 기술이나 차세대 서비스와의 연동 같은 전략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죠.
그의 말대로라면, 이전에는 훨씬 더 다채롭고 혁신적인 내용들이 있었다는 건데...... 저는 휴대전화와 TV 관련 보도만 봐 왔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내용들도 소개되기는 합니다만, TV/스마트폰처럼 열정적으로 보도하지도, 트렌드를 분석하지도 않습니다.
통신 장비 분야에서 결코 최선두라고 할 수 없는 우리나라가 통신강국이라는 자랑을 계속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 하는 부분에서 남과 다른 아이디어와 전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그 분야의 트렌드 변화와 선두 기업들의 전략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어야 합니다. 통신사나 단말제조사가 하지 않는다면, 방송통신위원회가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MWC에 부스를 설치하기 위해 주최 측에 낸 자릿세만 6억원이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전세계 통신 분야의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몇몇 주요 시장에서 기자간담회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MWC에 참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 행사에 수십 명의 기자가 참가한 나라에서 “혹시 스마트폰 말고 다른 기사는 없나?”하고 눈에 불을 켜고 기사를 검색해야 한다는 건 참으로 힘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CES, MWC 참가 펀드라도 한번 모집해 봐야 되는 걸까요? 모 대학 벤처 워크샵에서 강의를 했다는 그런 분을 보내면 이들 행사에 돋보기를 갖다 댄 것처럼 재밌고 알찬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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