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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통신/전략과 정책

클라우드 시대, 네트워크의 가치

- HP와 시스코의 결별 그리고 협력

【사람중심】 IT 분야에서 네트워크는 주요 영역의 하나이지만, 늘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네트워크를 ‘빨랫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소프트웨어나 컨설팅 분야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저차원적인 분야로 인식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가치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나 컨설팅 분야에서 모두가 강조하는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무실과 떨어진 서비스 사업자의 데이터센터에서 IT를 빌려다 쓰는 방식이 활성화되려면, 이것이 사무실 안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성능을 보장해야 합니다. 한쪽의 데이터센터에 장애가 나거나, IT 리소스가 부족해 다른 데이터센터로 급히 옮겨야 할 때도 가장 똑똑하고 빨리 이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네트워크입니다.

최근 들어 CDN 서비스나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WAN 가속기 시장이 활발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정된 네트워크 위에서 원격지 간의 통신을 더욱 안정되고 빠르게 하려면 그것에 특화된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시스코 스위치-HP 블레이드 연동 장비 등장

시스코가 최근 의미 있는 발표를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시스코와 HP가 공동으로 발표한 것이지만, 사실상 ‘공동 발표’로 보는 시각은 소수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시스코는 2009년 초에 UCS(통합 컴퓨팅 시스템)이라는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자체 개발한 블레이드 서버에, 가상화에 최적화된 네트워킹 기술을 통합하고, FCoE 기술로 스토리지 등과의 연결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데이터센터용 통합 시스템입니다. 단순히 서버-네트워크를 결합시킨 것이 아니라, 메모리와 I/O 등을 기존 방식과 비교할 수 없게 혁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랜 VIP 고객이었던 HP, 델과 등을 돌리게 됐고, “네트워크 전문업체가 만든 서버다. 데이터센터에서 서버가 멈추기라도 하면 어떻하냐?”는 네거티브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동종 업계로부터도 “네트워크 업체가 엉뚱한 데 눈을 돌린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스코의 행보를 비난하면서도 HP는 쓰리콤을, 델은 포스텐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14일, ‘시스코 넥서스 B22 패브릭 익스텐더 for HP(이하 넥서스 B22 HP)’라는 제품이 발표됐습니다. HP 블레이드 서버와 시스코의 통합 패브릭 스위치를 쉽게 연동시켜주는 네트워킹 장비입니다.

‘넥서스 B22 HP’는 표면적으로는 서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지닌 HP와 네트워크 시장에서 부동의 1위인 시스코가 윈-윈하는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코 UCS 출시 뒤에 적대 관계를 형성했던 HP가 왜 시스코와 손을 잡았을까요?

그 이유는 시스코가 제안한 가상화 네트워킹 방식이 이미 시장에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넥서스 스위치를 사용하는 고객이 이미 19,000여 회사나 됩니다. 이들 기업의 대부분이 가상화 서버를 지원하는 목적으로 넥서스 스위치를 도입했습니다. 시스코 얘기로는 넥서스 B22 HP 출시와 관련된 보도가 HP의 요청 때문에 늦춰졌다고 합니다.


가상화 스위칭, 802.qbh 대 802.qbg

시스코가 802.qbh라는 가상화 네트워킹 방식을 들고 나오자, HP를 중심으로 여러 서버·네트워크 전문업체들이 모여 802.qbg이라는 방식을 제안하고 나섰습니다. 시스코가 먼저였고, 그 차이는 불과 3주였습니다(802.qbg 진영을 VEPA라고도 하는데, Virtual Ethernet Port Aggregation의 약자입니다).

그런데 시스코는 자사의 가상화 스위칭 전략을 처음보다 두 단계 발전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넥서스 스위치의 소프트웨어 버전인 ‘넥서스 1000’을 개발해 VMware의 가상화 스위칭 SW 모듈인 v-스위치를 대신했고, 지금은 서버에 설치하는 ‘넥서스 1000 수퍼바이저 모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모듈은 데이터센터 전체의 ‘넥서스 1000’을 다 볼 수 있다. 가상 서버를 관리하는 VMware의 ‘v센터 시스템’과 API로 연결되어 통합 관리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802.qbg 진영은 클라우드 스위치가 나오기는 했지만, FCoE까지만 지원하는 상황입니다. 유수의 네트워크·서버 전문업체들이 모여 있는데도 제품 개발이 느린 이유는 VMware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802.qbh와 802.qbg는 모두 가상 서버를 위한 네트워킹 기술인데, 서버 가상화의 절대 강자 VMware는 시스코 진영에 속해 있습니다. 또 서버용 네트워크 카드(NIC) 분야의 강자들인 큐로직, 에뮬렉스, 브로드컴도 시스코의 802.qbh 진영입니다.

이처럼 가상 서버 전문업체와 가상 서버용 NIC 전문업체가 모여서 기술과 제품을 발전시켜 나가다 보니, 서버 가상화 시장의 요구가 잘 반영될 것이고, 서버 가상화를 추진하는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802.1bh 기반의 시스코 장비를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HP도 버추얼 커넥터라는 장비의 계획을 밝힌 바 있습니다만, 시스코 가상화 스위치가 이미 많이 공급된 상황에서는 세를 확장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발표에서 “넥서스 B22 HP는 고객들의 요청에 의해 탄생됐다”고 한 대목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합니다. 시스코는 “고객들이 HP 블레이드 서버를 넥서스 스위치와 쉽게 붙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 이번 제품이 출시된 배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차세대 데이터센터의 핵심 요소, 가상화 네트워킹

HP 블레이드 서버를 도입하면 이미 광범위하게 공급된 넥서스 스위치와 가상 서버의 네트워크 인터페이스를 통합해서 관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넥서스 B22 HP를 설치하면, 넥서스 5000 스위치에서 볼 때 HP 블레이드 서버에 꽂혀 있는 모든 B22 HP가 넥서스 5000에 속한 모듈로 보이기 때문에 관리가 극히 단순해진다는 것이 시스코의 설명입니다.

넥서스 B22 HP는 시스코가 새로 만든 802.qbr이라는 표준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자사의 가상화 스위칭 기술을 여러 블레이드 서버와 연동되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B22라는 제품명 뒤에 HP가 아닌 다른 서버 벤더의 이름이 붙은 익스텐더 장비도 잇달아 출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스코는 이 밖에도 패브릭 패스(FabricPath)라는 기술을 상용화했습니다. 특정 데이터센터의 L2 도메인을 다른 데이터센터의 L2 도메인과 연결해주는 이 기술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의 중요 이슈인 ‘데이터센터 모빌리티’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A 데이터센터의 가상서버를 B 데이터센터의 가상서버에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시스코는 지난 2006년부터 차세대 데이터센터의 네트워크 구조가 바뀌어야 된다는 점을 주창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HP·IBM을 설득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자 개발에 나서 UCS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넥서스 B22 HP라는 장비의 등장을 ‘시스코냐? HP냐?’하는 논리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상화·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서 똑똑한 네트워크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네트워크 벤더들도 가상화 스위칭 기술을 점점 발전시켜 나가고 있으니, 조만간 가상화 네트워킹 기술은 - 그것이 802.qbh가 됐든, 802.qbg가 됐든 - 데이터센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가 될 것입니다.

네트워크 기술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것. 클라우드 컴퓨팅이 가지고 온 커다란 변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참고 - 시스코코리아 블로그(www.ciscokrblog.com/59)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