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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통신/전략과 정책

챔버스, 시스코 한국지사장은 왜 내부승진 없나요?

【사람중심】 챔버스, 안녕하세요.


지난 주말에 시스코시스템즈 인사 관련 기사가 났더군요. 얼마 전 당신이 “몇년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식 발언을 한 뒤에 나온 인사 발표인지라, 당연히 기사 제목을 클릭해 보았습니다. 


전세계 영업부문을 이끌어 왔던 로버트 로이드  부사장이 제품 개발 및 영업부문 사장으로 승진했고, 게리 무어 부사장도 사장 및 COO로 승진했다는 내용. 당신이 17년 간 시스코의 CEO 자리를 지켰고, 2006년 당신이 사장 직함을 내려놓은 뒤로 이제껏 사장 자리가 공석이었다는 사실도 기사를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인사발령의 핵심 내용 보다 더 제 눈길을 끈 것은 월스트리트저널이 당신이 직접 말했다고 소개한 코멘트였습니다. “무어와 로이드는 첫 번째 잠재적 후보 구도에 서게 됐다. 이들과 함께 회사 내부에서 다른 후보들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 말입니다.


글로벌 기업은 내부에 인재가 없나?

시스코 존 챔버스 CEO

세계 유수의 IT 기업들이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나 한 단계 도약을 해야 될 때 외부에서 유명 인사들을 영입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보도자료를 발표해서 크게 홍보하죠. 몇십 년 간 IT 업계에 종사했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이 높으며, 그의 영입으로 회사가 날개를 달 것이라는 그런 내용으로요. 그런데 이런 보도자료를 받아 볼 때마다 늘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훌륭하다는 기업들이 내부에는 인재가 없었나?”하고 말입니다. 하필이면, 새 리더를 뽑기 직전에 약속이라도 한듯 회사의 인재들이 짐을 싼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회사 내부의 인물들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물론, 회사 내부 인물들‘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직 CEO의 입에서 “내부에서 차기 CEO 후보들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 만큼, 그 무게와 의미가 남다를 거라고 봅니다. 


회사의 역사와 전략과 비전을 잘 알고 있고, 회사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내부의 인재들 가운데서 조직의 다음 리더를 뽑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서 무조건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로지 직원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만이라면 CEO를 외부에서 데려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경우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정말 구조조정을 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외부의 도살자를 데려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것 보다 내부에서 구성원들과 오랫동안 신뢰관계를 쌓아온 사람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협의 속에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열정을 바칠 만한 일터’라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 조직이 어떻게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그 유명한 버블이 꺼진 뒤 수많은 기업들이 인력 조정으로 돌파구를 찾았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고용 즉 평생직장이 보장된 기업들이 훨씬 빨리 회복되고, 성장도 더 잘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비전문가와 파트너의 괴리’

당신의 뒤를 이을 CEO 후보를 내부에서 검토하는 이유가 제가 생각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스코의 인사발령 기사를 접하고,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의 리더를 조직 내부 인재들 가운데 선발하는 이유가 글로벌 기업의 본사에만 유효한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어서입니다.


시스코는 지금까지 한번도 지사장이 내부 승진한 적이 없습니다. 정권 실력자의 최측근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것은 제쳐두고라도, 그 동안 지사장을 맡았던 사람들 중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해 본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시스코 초대 한국지사장이었던 유영식 사장만이 네트워크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지금까지 업계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로 지사장이 바뀌면서 반복해서 들려오는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한국의 시스코 채널들 사이에서 늘 지사장과 관련한 불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외국계 IT 기업의 한국지사가 사실상 한국에서의 영업에 무게를 둔 조직이고, 그 영업의 거의 대부분을 채널과 함께 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채널은 해당 분야의 영업을 전문적으로 해온 회사들이고, 외국계 벤더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동반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채널들 사이에서 때로는 “지사장이 채널을 너무 무시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때로는 “지사장 일을 너무 안 한다. 비즈니스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지사장이 한국 시장이나, 한국 채널들을 위해 본사에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본 적 있느냐?”며 지사장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까지 얘기하는 채널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시스코 지사장 가운데 채널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평을 받았던 인물은 유영식 초대 지사장인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 시장과 영업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늘 채널의 입장을 이해했고, 본사에 한국 채널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유 전 지사장은 채널들의 입장을 대변하다 본사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주특기’, ‘열정’ 보다 중요한 이력서

물론, 시스코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외국계 IT 기업들이 지사장을 뽑는 것을 보면 해당 조직이나 해당 업계에서 “왜 저 사람이지?”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에는 ‘직업이 지사장’인 인물들이 꽤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한국사회의 특징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지사장을 뽑을 때 ‘지사장 경험’, ‘대기업 출신’이라는 두 가지 항목에 절대적인 무게를 두는 외국 기업들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 영어 회화가 얼마나 출중한 지도 중요한 덕목이라더군요.


수긍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시스코 코리아 출신의 모 인사가 글로벌 유명 IT 기업의 지사장이 된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알게 된 제가 시스코 코리아 지인들에게 “아무개가 A 기업 한국지사장이 됐다는데 어떤 사람이냐?” 물었을 때 놀라운 반응을 접했던 얘기를 해드릴까 합니다. 각각 제 질문을 받은 세 사람의 한결같은 반응은 “그사람이 왜?”였습니다. 그가 시스코를 나가게 된 이유가 ‘무능력’ 때문이라는 것도 세 사람의 한결같은 얘기였죠. 


하지만, 한번 지사장이 되면 ‘지사장 경험자’로 분류되고, 그 사람은 능력, 열정,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어지간하면 계속해서 지사장을 하게 됩니다. 지사장 후보의 인물 검증을 할 때 본인에게 검증할 인물을 추천받는 이상야릇한 방식 때문에 늘 지사장 전문가가 지사장이 된다는 것은 IT 업계 종사자들이 누구나 느끼는 문제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사장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어떻게 일할 것이냐?’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해당 분야에 어울리는 능력을 가지고 생산성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냥 계속해서 지사장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력서가 말해주지 않는, 그러나 중요한 덕목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는 경구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시스코가 서비스 기업으로의 도약을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고, 데이터센터 혁신을 강조하던 시기도 있었으니 거기에 맞게 외부 인사를 영입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서비스나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시스코가 강점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시스코의 주특기를 바탕에 깔고 시스코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시스코의 비즈니스를 잘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치더라도, 한국 시장의 특성을 본사에 이해시키고 지원을 끌어내는 사람, 한국 파트너들의 고충과 노력을 본사에 잘 전달해서 파트너들의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사람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고분고분 본사의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이 중요한가요? 후자라면, 지금처럼 지사장을 뽑는 방법이 훨씬 쉬울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사장을 뽑는 벤더가 얘기하는 ‘고객을 경험이 최우선 목표다’거나, ‘파트너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파트너나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력서에서 필요로 하지도 않고, 이력서의 몇 줄 글귀로 확인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시스코는 제 기억에 네트워크 업계에서 가장 먼저 ‘파트너의 성공이 시스코의 성공’이라고 강조해 온 벤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98~99년에는 기자들 대상의 워크숍에서 가장 강조하는 주제가 바로 이 ‘파트너의 성공이 시스코의 성공이다’였습니다. 당시에 꽤 신선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유독 채널과의 관계를 놓고 한국의 네트워크 시장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열정의 결과는 박탈감?

본사의 전지전능한 판단으로 외부에서 지사장이 뽑혀서 회사의 제일 윗자리에 앉게 될 때 생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오랫동안 시스코에 애정을 가지고, 시스코의 비전을 실현하는데 자신의 열정을 쏟아왔던 시스코 코리아의 사람들일 겁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몇몇 프로야구단이 감독을 교체하는 과정에 있는데, 전임 감독이 물러난 뒤 권한대행을 맡았던 수석코치의 심정을 소개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고 있고, 능력과 성과도 인정받고 있는데, 회사가 외부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 아마 글로벌 IT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본 임원들은 여러 번 겪었을 상황이겠지요. 그래서 내성이 생겨 이제 그런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 않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시스코 코리아는 지사장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마 한동안은 지사장이 바뀌지 않겠지만, 언젠가 새로운 지사장을 찾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때도 또 다시 외부에서 사람을 찾고, 내부에서 열심히 뛰어 온 사람들은 또 다시 박탈감을 느끼는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클 겁니다. 하지만, 시스코의 경쟁자들 중에는 한국에서 네트워크 분야 전문가를 사장으로 앉혀서 비즈니스가 성장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지사장이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킴으로써 한국지사를 매우 안정되고, 팀웍이 좋은 조직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두서없는 글이었습니다. 제 편지가 당신에게 전달될 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건강하고, 시스코가 지금까지처럼 혁신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만 총총.


2012년 10월 10일 한국의 B급 기자가



<덧붙임> 저는 당신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제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로 당신이 한국에 두 번 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때로는 시스코 본사 행사에 초청되어서 그룹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한국을 다시 찾을 기회가 생겨 차기 지사장 후보로 누가 좋을지 자문을 구한다면 만나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사견이긴 하지만, 시스코 내부의 누구누구가 좋은 사람인지, 내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네트워크 업계에서 어떤 인물이 좋은 사람인지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외부에서 찾는다면, 한국의 IT 업계에서 지사장을 가장 많이 해본 사람들이나, 유명 영어강사들 명단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네트워크나 클라우드 컴퓨팅 업계가 아닌 외부 사람 중에 한국의 시스코 비즈니스를 누가 가장 잘 이끌 수 있을지는 도통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류의 정보를 저보다 훨씬 많이, 훨씬 정확하게 알고 있는 시스코 코리아 내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껏 시스코 본사가 지사장을 뽑는 과정을 보면, 지사 인력들을 그다지 미더워 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혹시나 ‘이력서에 없는 다른 덕목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제 3자’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