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최근 아주 재미있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소규모 그룹 인터뷰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진행한 결코 길지 않은 발표였지만, ‘한편의 좋은 강의를 들었다’는 느낌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혁신'이었는데, 과거의 여러 혁신 사례들이 던지는 공통의 교훈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면서, 오늘날의 혁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강의 내용도 좋았지만, 강사가 준비를 아주 잘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최대한 가감 없이 옮겨볼까 합니다. 글로 정리하는 것이라 제가 받은 느낌을 다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라구 수브라마니안 / 주니퍼네트웍스 아태지역 기술책임자(CTO)
지난 10년 간 IT 산업은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혁신을 이루어냈다. 그런데 분야도 서로 다르고 혁신의 방법, 결과물도 많이 달라서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혁신들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성공적인 혁신들은 모두 다 공통된 법칙을 따르고 있다. 패턴이 있다는 얘기다. IT가 아닌 다른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 지난 100년 간의 혁신을 한 번 예로 들어보겠다.
* 금융 분야 - 지난 100년 간 금융 산업에서 가장 큰 혁신은 무엇일까? 고객에게 제공되는 금융 서비스 측면에서 가장 큰 혁신은 신용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혁신 전략가들은 신용카드가 상품이 아니라, ‘플랫폼(platform)’이라고 얘기한다.
신용카드의 한쪽에는 구매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맹점(상점)이 있다. 사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도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었지만, 신용카드는 이 행위를 훨씬 쉽게 만들어 주었다. 기존의 방식을 ‘혁신’한 것이다. 그래서 신용카드는 상품이 아니라, 플랫폼인 것이다.
* 소매업 분야 - 1920년대 수퍼마켓, 1970년대 쇼핑몰의 등장이 가장 큰 혁신이다. 둘 모두 새로운 상품은 아니다. 소매업의 한쪽에는 상점이, 다른 한쪽에는 구매자가 있다. 여기저기 상점을 찾아다니며 구매하는 행위는 예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쇼핑몰이나 수퍼마켓은 상점들을 한 데 모아놓음으로써 많이 걸어 다니지 않고도 물건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훨씬 쉽게 만들었다. 플랫폼을 혁신한 것이다.
* 비디오게임 분야 - 어릴 때 오락실에 가서 커다란 기계에 돈을 넣고 게임을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 게임이 끝나면 다른 게임기로 옮겨서 또 게임을 하고... 그런데 소니와 닌텐도의 게임기가 나오면서 이 방식이 혁신됐다. 여러 게임을 하나의 기기에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니와 닌텐도의 게임기는 새로운 상품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을 훨씬 쉽게 만들어주는 혁신 플랫폼이다.
* 광고 분야 - 지난 100년 간 광고 분야에서 가장 큰 변화는 TV와 구글이다. 광고를 보여주는 방식을 혁신한 플랫폼이다. 이 시장에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광고주와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검색자가 있다. 특히 구글을 짧은 기간에 광고를 제공하고 얻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 문서 작성 - 윈도 역시 플랫폼이다. 글을 쓰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손이나 타자기로 써야 되고, 그것을 관리하는 노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윈도 가 등장하면서 각종 양식의 문서를 쉽게 작성하고, 쉽게 저장할 수 있게 됐다. 윈도 플랫폼이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혁신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각 산업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특별한 상품이나 서비스의 등장이 아니라, 기존과 완전히 다른 플랫폼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이용자의 경험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소니·닌텐도의 게임기가 나오면서 과거 오락실에서 인기를 얻었던 게임기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구글은 온라인이 매우 중요한 광고의 공간으로 인정받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변화들이 모두 ‘플랫폼의 혁신’이라는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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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얘기 같지만, 사실 쉬우면서도 매우 명쾌한 설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데 있어 이처럼 공통된 패턴을 파악해서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런 만큼 듣는 이에게는 아주 유용한 내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발표자가 ‘플랫폼의 혁신’을 주제로 얘기를 한 것은 최근 주니퍼네트웍스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니퍼는 지난해 하반기, 자신들이 가장 경쟁력 있다고 자부하는 네트워크 장비 운영체제(OS) 주노스(JUNOS)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비즈니스의 중심에 세우는 전략을 천명했습니다.
이른바 ‘주니퍼 뉴 네트워크(New Network)’라는 것인데, 기존의 JUNOS를 ▶네트워크 장비에 탑재되는 OS(주노스), ▶서버 OS 위에 설치돼 데이터센터를 관제하고 다양한 애플리케이션도 연동할 수 있게 해주는 미들웨어(주노스 스페이스), ▶단말에 탑재돼 향상된 기능을 제공하고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연동할 수 있게 해주는 미들웨어(주노스 펄스)로 세분화했습니다.
이 같은 전략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사의 장점인 JUNOS를 단순히 운영체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와 여기에 연결되는 애플리케이션, 단말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플랫폼으로 확장해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노스 플랫폼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장비의 개발이나 기능 제공, 애플리케이션 연동, 단말의 서비스 품질 보장 등 네트워크와 관련이 있는 모든 영역에서 개발과 연동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고, 저렴한 비용으로 더욱 유연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마치 윈도 OS라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여러 애플리케이션 및 단말이 개발되고 하나로 묶이는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주니퍼는 이러한 전략 아래 주노스, 주노스 스페이스, 주노스 펄스의 컴포넌트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고 있는데 서버 전문업체와 제휴하거나, 단말 분야의 솔루션을 내놓는 등 결과물들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라구 수브라마니안 주니퍼네트웍스 아태지역 CTO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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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기술을 다루는 IT 분야 가운데서도 유독 플랫폼을 제대로 혁신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 바로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이미 공룡 같은 존재가 됐다(지구의 지배자였던 공룡이 바뀌는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한 것을 빗대어 표현한 듯합니다.).
지난해 주니퍼네트웍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네트워크 분야에서 플랫폼 전략을 도입하는 최초의 기업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는 지난 10여 년 간 고객들과 만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과거의 네트워크 접근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AT&T가 싱귤러를, 프랑스텔레콤이 오렌지를, NTT가 도코모를 인수한 것은 기존의 사업 즉 기존의 플랫폼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2년 전 호주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었는데, 아주 오지에 있는 마을까지 인터넷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하라고 호주 정부의 요청을 텔스트라가 거부했다. 그래서 정부가 그 작업을 하려고 했더니 막대한 비용 때문에 세금을 더 많이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사례는 통신 시장에서도 과거와 같은 행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 전세계 이동통신 사업자들을 수익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나라마다 상황은 조금 다르겠지만, 큰 흐름은 차이가 거의 없다. 바로, 트래픽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말 그대로다. 문제는 트래픽 양이 곧 비용이라는 점인데, 이 같은 트래픽 급증의 원인은 비디오다. 2009년 유튜브가 만들어 낸 트래픽 양이 2000년 전세계 인터넷 트래픽보다 많아졌다.
이것이 큰 문제다. 통신사가 트래픽 증가에 대응하려면 계속 장비를 사서 서비스 망을 확장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매출이 늘지는 않는다.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 비용이 점점 줄어들어서 매출도 개선될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비용과 트래픽 그래프는 2015년에 정확하게 역전된다(트래픽을 보장하고자 투자한 비용이 수익보다 많아진다는 얘기). 네트워크의 경제성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는 것이다. 시장분석 기관들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대략 이 시기를 전후해 그렇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주니퍼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과거의 네트워크가 가졌던 네트워크 경제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네트워크(New Network)가 필요하고, 그 새로운 네트워크는 과거 여러 산업에서의 혁신이 그랬던 것처럼 플랫폼 차원의 접근을 했을 때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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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이날 강의의 서두였습니다. 주니퍼는 플랫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완성도 높은 플랫폼을 만들고, 이것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하고, 이 플랫폼의 이용과 성장을 생태계에 맡기는 전략을 꾸준히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주니퍼는 네트워크 분야에서 완전히 자신의 영역을 공고하게 다진 기업이지만, 그렇다고 에릭슨이나 시스코 같은 대기업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 기업처럼 필요한 분야의 기업을 인수해 규모의 경제를 만들거나, 엔드-투-엔드 라인업을 만들어 산업군별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이 가장 강점으로 내세우던 것을 시장에 던져놓음으로써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보겠다는 전략은 주니퍼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매우 전략적인 한 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왜 주니퍼가 기존에 이 업계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전략을 만들게 됐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주니퍼가 New Network를 구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세부 전략은 앞으로 계속 다루어 나갈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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