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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전망

과유불급…드라마 속의 IT 그리고 도넛

[사람중심] 최근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드라마가 갑자기 PPL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바로 ‘더 킹 투하츠’라는 드라마입니다. 남한에 왕이 있다는 설정의 이 드라마에서 왕의 동생인 주인공은 세계장교대회에 대비한 훈련 차 북한에 머물면서도 훈련 중간중간 도넛을 먹습니다. “이게 먹고 싶어서 남쪽에서 올 때 100박스를 가지고 왔다” 어쩌고 하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입니다.


여기까지는 봐줄만 한데, 회를 거듭할수록 도가 지나쳤습니다. 지난주에는 남한 왕자와 북한 여장교가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도 도넛이 식탁을 가득 채웠습니다. 남한 왕자는 “도넛 먹을 때 커피랑 같이 먹어야 된다”는 살뜰한 배려도 잊지 않았는데, 기업 로고만 없었을 뿐 너무도 자주 봐 오던 광고의 한 장면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방송이 끝난 뒤 이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한에는 먹을 게 도넛밖에 없씀까?’, ‘왜 한과 아닌 도넛인가?’등의 기사가 등장했고, 댓글도 많이 달렸습니다. “왕실에서 상견례하는데 한식, 한과는 어디 갔냐?”, “도넛 홍보 너무 대놓고 한다”는 지적에, “왕자가 여주인공이 아니라, 도넛을 사랑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더 킹 투하츠’라는 제목이 도넛 회사의 이름과 발음이 유사하게 지어졌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원래 제목은 ‘더 킹’이었는데, 뒤에 몇 글자를 더 붙여서 도넛 회사 이름과 발음이 거의 유사하도록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런 의심을 받을만한 정황은 드라마에서 제공됐습니다.


PPL(Product Placement). 영화나 드라마 화면에 기업의 상품을 배치해 관객들의 무의식 속에 그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심는, 간접광고를 통한 마케팅 기법을 말합니다. 기업은 유명 드라마에 상품을 내비치니 좋고, 제작사는 치솟는 제작비 일부를 충당할 수 있어서 누이좋고 매부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도넛 회사 마케팅 담당자들은 그러거나 말았거나 상관없이 좋아할 지도 모릅니다. ‘TV에 몇 차례, 시간으로는 총 몇 분 동안 도넛이 나왔다’고 보고하면 칭찬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지적을 받을 정도면 효과만큼이나 부작용이 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 드라마 초반인데, 이제 도넛이 등장할 때마다 시청자는 짜증이 나겠죠? 사실은 원래 시나리오에서 왕자가 정말로 도넛을 ‘중독’이라 할 수준으로 좋아하는 설정이었고, 그래서 앞으로는 적절한 수준으로 도넛을 노출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드라마는 계속 동시간대 1위를 달리다가, 지난주에 1위 자리를 빼앗겼는데 “과도한 PPL도 이유 중 하나다”는 오해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특정 상품이 너무 자주 등장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드라마에는 아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이 100만원을 호가하는 최신 스마트폰을 씁니다. 그의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도 다 같은 스마트폰이죠. 통신사가 가장 조건이 좋은 마케팅 정책을 풀었을 때 다들 약속이라고 한 듯 번호이동을 한 것일까요?


더 킹 투하츠의 PPL 논란을 접하고 보니, 2009년 ‘국내 최초의 액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아이리스’가 생각납니다. 유명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고, 첩보물이어서 즐겨 보았는데,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해킹 전문가입니다. 상대방의 시스템에 수시로 접속해서 정보를 빼 내고, 공공기관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또, 다들 블루투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는데, 액션신이 많아 혹시 귀에서 빠져버릴까 그러는지 하나같이 블루투스 헤드셋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도록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소리가 울려서 통화하기가 불편한데 말이죠. 더 놀라운 것은 블루투스 헤드셋을 착용한 상태에서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 블루투스 헤드셋의 용도는 귀마개였을까요?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가장 눈에 거슬렸던 PPL은 대화면 영상회의 시스템인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였습니다. 텔레프레즌스는 실제로 첩보원들 간의 회의나, 대통령의 회의에 수시로 등장하고, 드라마 끝난 뒤 자막에 후원한 회사 이름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걸로 봐서 꽤 많은 비용을 지불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라고 느낀 것은 텔레프레즌스라는 명칭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할 텐데, 드라마 출연진들은 다들 이를 ‘TP’라고 줄여서 부른다는 점이었습니다. 드라마를 함께 보시던 어머니께서 “방금 뭐라 그랬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급기야 드라마 최종회에서는 텔레프레즌스 PPL이 폭발했습니다. 테러범들이 백화점에서 대규모 인질극을 벌이는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대통령과 각료들은 현장의 상황을 보고받을 때마다 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텔레프레즌스룸으로 옮겨서 보고를 받습니다. 평상시 집무실에서 개인용 텔레프레즌스 모니터로 영상회의를 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는데, 그 급박한 순간에 계속 자리를 옮깁니다. 아마, 마지막 방송이니 만큼 텔레프레즌스 시스템 가운데, 가장 비싼 모델을 후회 없이 노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작사나 후원사의 의도가 ‘아이리스의 주제는 대화면 영상회의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것은 아니었겠죠?


최근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유독 최신 스마트폰, 태블릿PC, 노트북 같은 IT 기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저 소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첨단 IT 기술·기기가 극의 철학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기업들은 아직까지는 간접광고를 하면서 극의 주제에 그것을 녹여 넣는 고민은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OCN에서 새로 시작한 토종 히어로 무비는 시대 배경이 미래로 설정돼 있는데, 투명 아이폰(아이폰9)이 등장합니다.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저택에서 생활하는 주인공과 가족 등 일부만이 사용합니다. 또, 경찰서 강력반 사무실에는 투명 모니터가, 주인공이 운전하는 차는 앞유리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더군요. 이것이 PPL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만약 PPL이라면 너무 과하게 노출하지 않으면서, 미래라는 배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왕가의 상견례에서 대접하는 도넛 보다는 세련된 간접광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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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