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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전망

패륜 게임의 시대

【사람중심】 최근 게임 규제를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게임이 청소년들의 인성을 해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청소년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마치 인터넷 게임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양 몰아붙이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정치권과 공공기관들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정말 나쁜 영향을 끼칠 것만 같은 정치인들의 막말이나, 기업의 범죄·협잡과 관련해서는, 지금 게임을 규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셧다운제(shutdown)’라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내놓은 그 누구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이 많이 깨어 있는 시간에는 강제로 텔레비전 뉴스 방송을 금지하는 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말입니다.


새벽 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시간을 정해놓고 청소년의 게임을 규제한다니... 참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대책입니다. 밤 12시가 지났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게임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게임 규제의 대상이 청소년에 국한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게임에 중독된 성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청소년 보다 단속 시간을 조금 줄여서 새벽 1시 이후에 게임을 금지해야 하는 것일까요? 밤 시간동안 게임을 하지 않고 낮에 온종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극악무도한 게임의 피해에서 구출해 낼 정책은 왜 없는 걸까요? 청소년들은 토·일요일에 0~6시를 제외하고는 내내 게임을 해도 정신건강에 문제가 없는 걸까요?




청소년 게임시간 묻지마 규제…게임업체 매출 1% 강제 징수?

지난해 셧다운제가 시작된 뒤 중학교 3학년생인 우리나라 프로게이머가 국제대회에서 경기를 하던 중 자정이 가까워오자 경기를 포기하는 웃시 못할 헤프닝이 벌어져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 게이머는 결국 부모의 계정으로 다시 접속해 게임을 마무리했는데, 해외에서는 이런 법이 만들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셧다운제도 모자라, 최근에는 ‘인터넷게임중독 예방에 관한 법률’과 ‘인터넷게임중독 치유지원에 관한 법률’이 발의되었습니다. 두 법안 모두 손인춘 의원(새누리당)이 동료의원 17명과 함께 발의한 것인데, 셧다운제 시간을 확대하고, 게임 기업의 매출 가운데 1%를 기금으로 강제 징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강화된 셧다운제를 함께 발의한 국회의원 가운데는 부산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지스타 행사가 매년 개최되는 해운대가 지역구인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지스타 행사로 특수를 누리던 부산 지역, 특히 해운대 지역 상인들은 게임이 범죄의 온상이고, 게임 금지 시간을 설정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그 정치인들의 논리에 얼마나 동의할까요?


셧다운제 강행이 논란이 되자 전병헌 의원(민주통합동)은 지난 16일 셧다운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부모의 동의를 받은 청소년은 심야 시간에도 게임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모바일 게임 셧다운제 적용은 폐지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반발하는 게임업계 게임축제 보이콧 움직임…난감한 부산시 

게임 업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국내 최대 게임축제인 ‘지스타(G-STAR) 2013’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임 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임 업계 공동으로 보이콧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지스타 행사의 메이저 후원사 중 일부가 불참 의사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 대회의 메인 스폰서였던 위메이드가 대표적입니다. 위메이드 남궁훈 대표의 불참 선언에 애니팡 개발사인 선데이토즈 등 여러 업체가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부산시가 난리 났습니다. 부산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지스타를 벡스코에서 개최했고, 2013년부터 2016년까지의 개최권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게임 업계가 보이콧할 움직임을 보이자 부산시 관계자들이 서울로 상경, 게임협회를 방문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부산시는 이 자리에서 정부의 ‘묻지마 규제’를 막는데 힘을 보태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참으로 웃지도 못할 노릇입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게임 규제 법안에 이름을 올리고, 해당 지자체는 게임 업계와 힘을 모아 이 법안을 막겠다고 나서고...



지스타는 지난해에만 세계 31개 나라의 434개 기업이 참가했고, 관람객만 30만명을 유치했습니다. 부산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가 1000억원이 넘는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죠. 2009~2012 4년 동안 4100억원의 생산 유발 효과, 1860억원의 부가가치 유발 효과, 3800여명의 고용 유발 효과는 부산시 입장에서 지스타 행사가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죽음을 희화한 게임…개인의 자유?

그런데, 또 한편에서 게임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습니다. ‘바운지볼’이라는 게임 때문인데, 공을 튀겨 레벨을 높이는 이 게임이 문제가 된 것은 공 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게임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캐릭터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고 비하하는 표현들이 수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공이 아래로 떨어질 때 ‘운지’라는 소리가 나는데, 이는 특정 성향의 누리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할 때 쓰는 표현이다. 1990년대 출시된 ‘운지천’이라는 건강음료 광고에서 모델이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며 “나는 자연인이다”고 외치는데, 이 장면이 노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을 떠오르게 한다며 ‘운지’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바운지볼’ 게임에서도 “나는 자연인이다”는 효과음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공이 떨어질 때 “아, 기분 좋다”는 효과음도 흘러나옵니다.

노무현재단은 지난 주, 이와 관련된 입장을 밝혔습니다. ‘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는 인터넷게임 제작·유통에 대한 입장’이라는 논평을 통해 “최근 인터넷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온라인 게임이 제작되어 유통되고 있는 사실에 분노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일부 네티즌들의 반인륜적 행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가능한 모든 대응과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게임의 위험성에 비분강개하며,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분연히 떨쳐나섰던 정치권이나 규제기관은 이와 관련해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가 특정 온라인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륜’이나 ‘도덕’이라는 우리 사회 공통의 가치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게임이나 다루는 자신들이 감히 건드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하지만 ‘바운지볼’ 게임은 청소년과 아동들이 많이 즐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게임을 제작해서 유포하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운지볼’을 만든 것도, 이용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놓고 보더라도 게임 셧다운제는 말이 안 되는 법안이 아닐까요? 그런데, 최근 해외에서는 ‘바운지볼’ 논란과 비교해 볼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내전을 반영한 게임…앱스토어 등록 거부돼

‘시리아 종전(Endgame: Syria)’은 안드로이드용으로 이미 배포되고 있는 게임인데, 지난 1월 8일 애플 측으로부터 앱스토어 등록을 거부당했습니다. '특정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전쟁은 게임의 가장 친근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현재진형형인 전쟁을 게임으로 옮겨놓은 경우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리아 종전'은 현재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 사태를 배경으로 만든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내용은 시리아 반군의 입장에서 의사결정을 내려 전쟁의 결과를 낼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고 합니다. 개발사 측은 현실세계의 전쟁 상황이 바뀔 때마다 게임 내용을 업데이트한다는 계획인데, “교육미디어로서 일종의 저널리즘 대안으로 게임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정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데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 사건을 오락성 게임에 채택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은 지금까지 최소 6만명이 희생되었고, 앞으로 희생자가 얼마나 더 나올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애플은 이 게임이 특정 인종, 종교, 정부 등이 타깃이 될 수 있는 콘텐츠를 담고 있다고 판단, 앱스토어 등록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의 내용이 패륜인지 아닌지 그 기준을 정확히 재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살인 장면이 몇 분에 한번 이상 나오면 안 된다’거나, ‘피가 튀기는 장면이 전체 화면의 얼마 이상을 덮으면 안 된다’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그 기준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스운 노릇입니다.


하지만, 꼭 이런 항목이 아니더라도 그 게임이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를 저버렸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적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논란이 여전한 전직 대통령의 사망 사건을 조롱하거나, 수만명의 무고한 민중이 죽어가는 전쟁을 게임 시나리오로 채택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겠지요. 만약 이런 게임들이 패륜이 아니라면, 인간 사회는 점점 더 도덕에 둔감해지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윤리를 벗어난 행동에 점점 관대해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걱정하고 분노할 일에 눈을 돌리는 건 어떨지...

게임이 청소년(또는 전체 게임 이용자)의 인성과 건전한 사고 발달에 미치는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정말로’ 우려된다면 게임 이용 시간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성인의 계정을 이용하는 등 회피할 방법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조치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점은 무엇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 그토록 걱정하는 것만큼 온라인 게임이 위험한 것이라면, 그래서 이 사회에서 강하게 감시·규제해야 될 대상이라면, 그 동안 온라인 게임을 육성했던 정책을 사과하고, 게임 업체들이 낸 세금과 고용 창출 그 모든 효과가 추악한 것이었다는 선언부터 해야 될 것입니다.


‘시리아 종전’은 안드로이드 앱 장터에서 지금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바운지 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게임들은 굳이 오랜 시간을 이용하거나, 밤늦게 이용하지 않더라도, 게임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지켜온 보편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콘텐츠입니다. 이런 사실을 외면하면서, 각계의 반대의 목소리를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셧다운제가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이들 게임이 훼손하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굳이 주절주절 설명해야 된다면 그것은 보편적 가치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나 가르칠만한 것입니다.


셧다운제라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보면서, ‘시간을 정해주는 것으로 어떤 행위를 제한 또는 계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불법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기업들의 영업 활동 시간을 제한하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영업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은 타격을 받을 테고, 그것이 두렵다면 불법이 줄어들 테니까요. 


게임이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는 것의 단 1%만큼이라도,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백혈병으로, 과로로 사망한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관련기사  노무현재단 “명예훼손 게임, 대응과 조치 취할 것”  (경향신문)

              시리아 전쟁 게임, 단지 게임일 뿐이에요(?)  (Economist)


<김재철 기자>mykoreaone@bitnews.co.kr